아이들이 유명작품인 <철제 빔에 앉아 점심을 먹고 있는 뉴욕의 건설노동자들> 속에 들어가 작품 속 주인공처럼 포즈를 잡고 있다.
코로나19로 더욱 길게만 느끼져는 겨울방학이다. 스마트폰만 껴안고 ‘집콕’만 하기 쉬운 시기에 자녀들을 데리고 전시회 나들이 다녀오면 어떨까?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는 ‘게티이미지 사진전―세상을 연결하다’가 한창 열리고 있다. 오늘날 각종 사진과 이미지 속에 새겨진 워터마크 ‘gettyimages’로 유명한 게티이미지는 1995년 영국 런던에서 설립된 이래 26년간 인류의 기록을 이미지와 영상 매체로 보관하는 아키비스트 구실을 해왔다. 서울에서 첫선을 보이게 된 세계 최초 대규모 기획의 ‘게티이미지 사진전’은 보유 중인 4억장 이상의 아카이브 중 ‘연결’이라는 키워드로 330여점을 골라 선보인다. 겨울방학을 맞아 중학생 딸과 초등학생 아들을 데리고 사진전시회를 방문한 양선아(43)씨의 관람을 따라가봤다.
지난 13일 영하의 추운 날씨에 예술의전당을 찾은 안민지(13)양과 안민규(11)군은 ‘설렘 반 귀찮음 반’의 표정이었다. 겨울방학 이후 첫 가족 외출로 설레기도 했지만, 워낙 ‘집돌이’ ‘집순이’인 탓에 ‘왜 귀찮게 전시회냐’ 하는 표정도 숨기질 못했다.
다행히 전시장에 입장하자마자 아이들을 반겨주는 건 ‘레터프레스’ 체험이었다. 아이들의 눈이 반짝 빛났다. 마음에 드는 사진 엽서를 하나 골라서 프레스기(압착기)에 넣고 힘껏 누르면 ‘게티이미지뱅크’라는 글자가 입체적으로 새겨지는 체험이었다. 이는 예전에 게티이미지가 자신의 인증마크를 새겨넣던 방식으로, 관객들도 경험해볼 수 있게 했다. 체험활동으로 흥미가 돋은 아이들은 “게티가 뭐야?”라고 물었다. 마침 그 공간은 관객들에게 게티이미지뱅크를 소개하는 곳이었다. 양씨는 아이들과 찬찬히 설명을 읽어본 뒤 “게티이미지가 무료 이미지를 제공해주는 곳인 줄로만 알았는데,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 사진은 물론이고 비디오도 업로드하는 멀티콘텐츠 플랫폼이라니 놀랍다”고 말했다.
본격적인 사진전이 시작되었다. <그랜드센트럴역으로 들어오는 태양> <경비원의 개> <개와 산책> 등 그림같이 아름다운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양씨와 아이들이 ‘우와 멋지다’며 탄성을 질렀다. 오드리 헵번과 비비언 리 등 유명 배우들의 사진과 영화 촬영 사진 등도 눈길을 끌었다. 물리 분야에 관심이 많은 민지양은 아인슈타인이 혀를 내밀고 있는 익살스러운 사진을 좋아했고, 민규군은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분장 사진을 좋아했다. <철제 빔에 앉아 점심을 먹고 있는 뉴욕의 건설노동자들> 사진은 이 가족뿐 아니라 다른 관람객들도 가장 오래 시간을 보내며 대화를 나누는 명작이었다.
두번째 섹션은 ‘현대 르포의 세계’였다. 분신자살을 시도한 아프가니스탄 여성, 소수민족 탄압으로 이주하는 로힝야 민족,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어린이 사진들, 멸종위기의 코뿔소와 고릴라가 밀렵되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코뿔소와 고릴라 사진 앞에서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아이들은 설명을 찬찬히 읽으면서 “너무 안됐다”며 “사람들이 왜 꼭 이렇게까지 하는지”에 대해서 엄마에게 물었다. 양씨는 “코끼리가 상아 때문에 밀렵되는 건 알았는데 코뿔소와 고릴라도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지 몰랐다”면서 아이들의 슬픈 마음을 다독여줬다.
세번째 섹션은 ‘기록의 시대’였다. 높이가 6미터쯤 되는 거대한 방은 사진의 발명 이래, 20세기부터 현재까지 카메라로 기록한 각 시대상을 ‘기술’ ‘인권’ ‘전쟁’ ‘빈곤’ 등의 키워드로 살펴보는 공간이다. 그야말로 ‘미니 현대역사관’이었다. 아이들은 20대의 젊은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 사진을 보고 반가워했고, 여성의 마라톤 참가가 금지된 시절에 마라톤에 참여했다가 제지당하는 여성 사진, 여성의 참정권을 요구하다 경찰에 제압당하는 사진을 보고 어리둥절해했다. 민지양은 “원래 여성들은 참정권이 없었던 거냐”고 물었고, 양씨는 “선진국에서도 여성이 투표권을 가진 것은 100년 안팎의 일”이라고 일러주었다. 가족들이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낸 곳은 광주 민주화항쟁 사진 앞이었다. 민지양은 “전쟁을 책과 글로만 보다가 사진으로 보니까 실감이 난다”며 “책에서 ‘학살’이나 ‘많이 죽었다’는 표현을 봤을 때와 달리 피 흘리는 사진, 총을 겨누고 있는 사진을 보니 피해자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들이 그대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게티이미지 사진전은 ‘미니 현대역사관’을 방불케하는 유명한 역사적인 사건 사진으로 가득하다.
네번째 섹션은 ‘연대의 연대기’였다. 반복되는 역사 속 아이러니를 관람객이 체감할 수 있도록,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발생했지만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 두 점을 교차로 구성했다. 2차 세계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한국전쟁의 인천상륙작전이 교차되었고, 쿠바의 체 게바라-피델 카스트로 행진과 미국의 마틴 루서 킹 행진이 교차되었다. 데칼코마니처럼 비슷한 모습의 서로 다른 사진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해 되풀이되는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섯번째 섹션인 ‘일상으로의 초대’에서는 사상 초유의 팬데믹 시대를 겪고 있는 이 시대를 위한 응원과 위로의 메시지를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었다. 1937년 독감이 대유행 중인 할리우드에서 감염 예방을 위해 보호 마스크를 착용하고 키스를 하는 영화 속 키스 장면, 풍선 댄서들이 파도가 부서지는 모래사장에서 춤을 추는 사진들은 관람객 모두에게 미소를 머금게 했다.
같은 주제로 다양한 사진을 보여주는 ‘연대의 연대기’ 섹션.
섹션별로 색다른 공간으로 이동…‘인증샷’ 인기
마지막 ‘에필로그’ 방은 부록과도 같은 방이었지만 이들 가족이 가장 좋아한 공간이었다. 이곳에는 게티 사진 중 예쁘고 인상적인 사진들을 입체적인 액자에 담아서 전시하고 있었는데, 사진을 찍으면 예쁘게 나오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인증샷’을 찍는 관객들로 붐볐다. 이들 가족도 단톡컷과 단체컷, 다양한 각도의 ‘셀카’를 찍느라 분주했다.
관람을 마친 뒤 양씨는 “영화 <시네마천국>에서 옛날 사진을 돌려 보는 것처럼 이번 사진전을 보고 나니 역사의 뒤안길을 산책하고 나온 느낌”이라며 “전시 공간도 다양하게 구성하고 주제도 다채롭게 잡아서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시각적인 재미뿐만 아니라 섹션별로 이동했을 때 다른 느낌을 주는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색다른 즐거움을 주는 전시였다”며 “날씨가 추우니까 아이들이 ‘집콕’만 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아이들에게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꼬셔서 나온 보람이 있다”고 덧붙였다.
민지양은 “그림 전시회와 달리 사진 전시회는 별로 안 가봤는데, 그림과 달리 실감나고 생동감이 있는 사진을 보는 재미를 느꼈다”며 “앞으로도 종종 사진 전시회를 오고 싶다”고 말했다. 민규군은 “전쟁 사진과 동물 사진들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며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전쟁이 반복됐다는 것을 알게 됐고, 사람이 죽어가는 전쟁터에서도 사진이라는 기록을 남긴 사진작가들이 대단해 보였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편, 게티이미지 사진전은 교육프로그램으로 미술관 이야기 ‘아트 스튜디오’를 운영한다. 이는 예술교육 전문가와 함께 작품 앞에서 진행되는 아트스토리텔링과 전시와 연계된 아트클래스를 통해 생각을 이끌어내는 소통 중심의 프로그램이다. 유치부, 초등부, 중등부까지 참여할 수 있으며 최대 4~5명으로 팀이 꾸려진다. 수업은 사진 수업, 스토리텔링, 아트클래스, 전시 브리핑 등으로 구성된다. 수업 문의는 ‘미술관 이야기’ 카톡 채널을 추가해서 할 수 있다.
전시회 쪽은 “게티이미지뱅크의 세계 최초 대규모 기획이다 보니 티켓 오픈 3주차에 1만장을 판매하는 등 관심이 뜨겁다”며 “특히 설 연휴를 앞두고 가족 관람객들의 예매율이 높다”고 말했다. 전시회는 오는 3월27일까지.
글·사진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컬러풀한 사진들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많이 찍는 공간인 에필로그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