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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권·복지

형제복지원 4년, 국회 앞 길바닥 2년…“짐승에서 사람이 되어가는 시간”

등록 2019-12-21 13:25수정 2019-12-30 17:15

[토요판] 김종철의 여기
과거사법 단식농성한 최승우씨

중1 하굣길에 형제원 끌려가
4년여 생지옥 속에서 살아
나온 뒤엔 길바닥 인생 전전

보상받으려 형제원 운동 시작
2년여 걷기·노숙투쟁 하면서
국가가 저지른 부당함 알게 되고
내 안에 쌓인 폭력성도 깨달아
“내가 준 상처엔 진심으로 사과”
“처음 목적은 국가적 배상이었죠. 그런데 차츰 우리한테 무엇이 정말로 필요한가를 제대로 알아갔죠. 부랑인이라는 낙인을 벗기 위해서는 명예회복을 해야 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어요. 정말 짐승 같은 삶이었는데 사람으로 거듭나는 현재의 삶을 저는 되게 만족해요.” 국회 앞 지하철역 지붕에서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위한 과거사법 통과를 요구하며 23일간 단식농성을 했던 피해 생존자 최승우씨가 지난 11일 오후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처음 목적은 국가적 배상이었죠. 그런데 차츰 우리한테 무엇이 정말로 필요한가를 제대로 알아갔죠. 부랑인이라는 낙인을 벗기 위해서는 명예회복을 해야 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어요. 정말 짐승 같은 삶이었는데 사람으로 거듭나는 현재의 삶을 저는 되게 만족해요.” 국회 앞 지하철역 지붕에서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위한 과거사법 통과를 요구하며 23일간 단식농성을 했던 피해 생존자 최승우씨가 지난 11일 오후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2년 넘게 국회 앞 길바닥에서 살고 있는 사람 둘이 있다. 부산 형제복지원의 피해 생존자인 최승우, 한종선씨다. 국회 의원회관 쪽 정문 옆에 있는 한평 남짓한 작은 천막이 그들의 집이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둘이 지키던 집에는 요즘 한씨만 있다. 최씨는 병원에 있다.

대규모 인권유린 사건인 부산 형제복지원(1975~1987년)의 진상규명을 위한 노숙농성을 시작한 지 만 2년째이던 지난달 7일 최씨는 한씨 몰래 천막 위 지하철역 지붕 위로 올라갔다. 형제복지원 사건 등 국가폭력으로 인한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과거사법’(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통과를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굴러떨어지기 쉬운 둥근 지붕 위에 허술하고 작은 비닐 천막을 치고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법 통과가 이뤄지기 전에는 내려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한겨울 추위와 전망이 보이지 않는 국회 상황에 지친 그는 단식 23일째인 지난달 29일 의식을 잃고는 실려 내려왔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 병실에서 최씨를 만났다. 집중치료실에 머물다가 일반실로 옮긴 지 이틀째였다. 몸은 많이 회복됐지만, 불굴의 투사는 얘기 도중 여러차례 눈물지었다.

자유한국당 반대에 막힌 과거사법

―이번이 두번째 단식이죠?

“19대 국회 말인 2015년에도 한번 했었어요. 그때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법을 통과시키겠다고 의원들이 만류해서 그만뒀는데 국회가 폐회하면서 아무런 성과가 없었죠. 이번에는 예정에 없던 단식이었어요. 법 통과 될 때까지 길거리에서 싸우자고 종선이랑 약속하고 국회 앞에서 노숙농성을 한 지가 2년이 넘는데도 앞이 안 보이더라고요. 20대 국회가 끝나면 또 21대 국회 4년을 기다려야 하잖아요. 제가 벌써 50대인데 이대로 가면 병들겠더라고요. 이미 지난 2년 동안 종선이랑 제가 둘 다 많이 아팠어요. 그래서 혼자 결심했죠. 올라가서 단식하자고. 종선이는 평소 우리가 하는 노숙농성도 중요한 활동이기에 이것을 꾸준하게 해나자는 입장이었어요. 못 하게 말릴 게 뻔해서 얘기 안 하고 올라갔어요.”

―23일간의 단식투쟁에도 과거사법은 아직 법제사법위원회에 묶여 있어요.

“자유한국당이 반대하는 속에서 어제(10일) 새해 예산안이 더불어민주당과 다른 4개 정당의 찬성으로 처리되는 상황을 보면서 간밤에 한숨도 못 잤어요. 저렇게 되면 과거사법이 더 어렵게 되거든요. 자유한국당이 장외로 나가 되게 화가 나요. 앞으로 일이 불안하고요.”

―자유한국당이 과거사법안을 결사반대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과거 독재정권에서 인권유린 사태가 있었지만 자기들이 직접 당사자가 아니잖아요. 민주정당이라면 과거의 인권침해를 바로잡자는 것을 반대하면 안 되는 거고요.

“그렇죠. 더구나 자유한국당이 지금 야당이니까 오히려 억울한 사람들을 더 보살펴야 할 텐데 정반대예요. 그들이 여당이었을 때인 지난 19대 국회에서는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반대했어요. 당시 정종섭 행정안전부 장관이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든다’고 이야기했고. 조원진 의원도 똑같은 이유로 반대를 해서 폐기가 되어버렸단 말입니다. 사실은 돈 때문이라기보다는 과거사위의 문제들을 해결해주기 싫었던 거죠. 왜냐면 그들의 민낯이 드러나니까요. 자기 선배들이 저질렀던 것들이 고스란히 자신들에게 여파가 오니까 들춰내기 싫었던 거겠죠.”

최승우씨는 1982년 열네살이던 중1 때 집으로 가던 길에 파출소 경찰관에게 잡혀서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 형제복지원에서 4년여 동안 지옥 같은 삶을 살았으며, 나와서도 길거리를 헤매며 밑바닥 인생을 살아야 했다. 최씨가 지난 11일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에서 &lt;한겨레&gt;와 인터뷰하던 중 옛일을 얘기하면서 회한에 잠긴 표정을 짓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최승우씨는 1982년 열네살이던 중1 때 집으로 가던 길에 파출소 경찰관에게 잡혀서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 형제복지원에서 4년여 동안 지옥 같은 삶을 살았으며, 나와서도 길거리를 헤매며 밑바닥 인생을 살아야 했다. 최씨가 지난 11일 서울 면목동 녹색병원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던 중 옛일을 얘기하면서 회한에 잠긴 표정을 짓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형제복지원 사건이 2012년부터 다시 이슈가 되면서 애초에는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으로 추진됐다. 진선미 민주당 의원이 19대에 이어 20대 국회에서도 특별법을 대표발의했으나, 지난 5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논의 과정에서 국가 공권력이 벌였던 반민주적·반인권적 폭력 사건들의 진상규명을 위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안에 합쳐졌다. 1982년까지 존재했던 경기도 안산의 선감학원, 1960~70년대의 서산개척단 등 새로 불거져 나온 인권유린 사건들도 과거사법에 통합됐다. 이 과거사법은 자유한국당을 뺀 나머지 정당의 합의로 10월22일 행정안전위원회를 통과해 법사위로 넘어갔으나, 법사위에서는 아직 안건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과거사 사건 피해 유가족들은 지난달 말 국회에서 나경원 당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에게 무릎을 꿇고 과거사법 통과를 호소하기도 했다.

―형제복지원 진상규명 운동은 2013년 한 기사를 우연히 보고 기자한테 이메일을 보내면서부터 시작했죠. 그 전에는 잊고 지냈나요?

“그 전부터 억울한 생각에 관심은 많았지만 형제복지원 사건을 알릴 방법을 몰랐어요. 인터넷에 소식이 올라오나 살펴봐도 거의 없었고요.”

“요즘엔 자주 행복한 눈물 흘려”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시 북구 주례동에 있었던 형제복지원은 부산시와 위탁계약을 맺은 이른바 ‘부랑인 강제수용시설’이었다. 매년 20억원 이상의 국고 지원을 받았다. 형제복지원은 지원금을 더 받기 위해 ‘부랑인 선도’라는 완장을 차고 거리의 취약한 사람들을 직접 잡아오기도 했으며, 경찰과 구청 등 관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1987년 신민당 보고서에 따르면, 경찰은 당시 일반 구류자에 대해서는 1명당 2~3점의 평점을 받았으나 형제복지원 입소자에 대해서는 5점을 받았다.

‘한국판 아우슈비츠’라는 별명처럼 형제복지원 내부에서는 구타와 감금, 강제노역, 성폭행, 타살, 암매장 등 불법적이고 반인권적인 일들이 난무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사망자만 해도 551명이다. 1986년 말 야산으로 사냥 갔던 울산지청의 김용원 검사가 형제복지원 수용자의 강제노역 현장을 목격한 뒤 이듬해 1월 수사에 나섬으로써 복지원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수사를 방해·축소했다. 또 원장 박인근(2016년 사망)에 대한 재판도 석연치 않았다. 벌금 6억여원은 2심에서부터 사라졌으며, 불법구금 혐의도 대법원에서 무죄로 판단했다. 박인근은 국고보조금 횡령 등 몇가지 작은 혐의로만 2년6개월 실형을 살고 나왔으며, 그 뒤 그는 형제복지원 터 매각 등으로 수천억원대의 자산가가 됐다. 반면에 1987년 폐쇄 당시 3500명에 이르렀던 수용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그 후 제대로 된 진상조사는 한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잊혔던 형제복지원 사건은 피해 생존자인 한종선씨가 2012년에 국회 앞에서 1인시위를 시작하면서 다시 알려졌다. 2013년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대책위원회)와 2014년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와 실종자·유가족 모임’(피해생존자 모임)이 만들어졌다. 최승우씨도 2013년부터 함께 활동했다.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위한 운동을 한 지가 벌써 7년이나 됐군요.

“처음에 저는 부산 서면에서 팻말시위 등을 했어요. 그러다가 2015년 4월 종선이랑 국회 앞 노숙농성, 2017년 9월 형제복지원 터에서 청와대까지의 국토대장정 등을 함께했지요. 그중 국토대장정이 저를 많이 바꾸는 계기가 됐어요.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들은 저부터 그랬지만 그 안에서 폭력에 길들여졌잖아요. 피해의식과 폭력성이 강해서 걷는 22일 동안 자주 다투는 등 트러블이 많았어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제가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운동 방식에 대해 조금씩 알아갔고요.”

―어떻게요?

“그 전까지는 제가 무엇 때문에 이 활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뚜렷한 게 없었어요. 내가 당한 피해에 대한 국가적 보상 하나만 보고 나왔지, 이 운동의 의미에 대해 감을 못 잡았던 거죠. 국토대장정과 그 후 노숙농성을 시작하면서부터 이 사회를 제대로 알게 됐어요. 또 국회에 있으면서 국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게 되었고요.”

―처음에는 보상받는 데만 관심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보다 중요한 다른 가치를 알게 됐다는 말씀이죠?

“예, 맞습니다. 처음 목적은 국가적 배상이었죠. 그런데 차츰 우리한테 무엇이 정말로 필요한가를 제대로 알아갔죠. 우리가 그 안에서 부랑인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렸잖아요. 부랑인이더라도 잡아가면 안 되지만 국가가 부랑인이 아닌 사람을 잡아가서 부랑인을 생산해낸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국민들이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저희들이 부랑인으로 비치기 때문에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명예회복을 해야 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죠.”

―어떤 계기가 있었어요?

“한종선 피해 생존자 모임 대표한테 많이 배우고 도움을 받았어요. 종선이는 이명박 정권 때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때부터 거리에 나와서 그런 것을 먼저 깨달았던 친구죠. 그와 대화하면서 ‘이것은 나만의 문제는 아니구나. 모든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문제구나’라고 느끼게 된 거죠. 사회적 운동은 피해에 대한 배·보상보다도, 그건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고, 국가가 폭력을 저지른 피해 당사자들의 운동이 되어야 하는구나, 내 명예를 찾고 수많은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싸우지 못하는 것을 내가 대신해서 싸워야겠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래야 우리 대한민국에 변화가 올 것이고, 미래의 아이들은 더 행복한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죠.”

―얼마 전 페이스북에 ‘이제는 짐승에서 사람이 되어가는 시간이다’라고 썼던데 삶의 이런 변화를 말하는 거군요.

“그 단어도 원래 종선이가 썼어요. 그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되면서 저도 이제 쓰는 거죠. 정말 짐승 같은 삶이었는데 사람으로 거듭나는 현재의 삶을 저는 되게 만족해요. 비록 제가 몸과 마음은 힘들지만 고공 단식농성을 선택하게 된 것도, 제가 믿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시도를 했던 거고요. 그동안 항상 내 주위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저에게도 사람이 많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렇게 느낄 때마다 감동하고 눈물을 흘려요. 예전에는 아플 때만 눈물을 흘렸는데 요즘엔 너무 뿌듯하다 보니까 기분 좋은 눈물이 많아졌어요. 행복한 눈물이죠.” 어느새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2년 동안 국회 앞 길바닥에서 텐트 치고 산 게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부유해졌다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그렇죠. 저한테는 배·보상보다 더 큰 거죠. 몸은 너무 힘들었지만 텅 비었던 머릿속이 제대로 찬 거죠. 좋은 분들도 많이 만났고요.”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최승우도 가해자로 만든 폭력구조

최씨는 어린 시절 행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두살 터울의 동생과 함께 가족의 사랑 속에서 자랐다. 다섯살 때 부모가 이혼을 하면서 동생은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가고 그는 부산 할머니한테 맡겨졌지만, 일찍 철이 든 그는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에서 뭐든 열심히 했다. 그런 꿈이 깨진 것은 중학교 입학한 지 얼마 안 지난 1982년 4월 어느 날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개금파출소 앞에서 담배 피우던 경찰관이 그를 불러 세웠다. 가방 속에서 먹다 남은 빵을 보고는 어디서 훔친 것이냐고 추궁했다. 가난한 집 아이들한테 급식으로 나눠준 빵을 아껴 먹으려고 넣어둔 것이었다. 라이터 불로 성기 고문을 당하는 등 경찰관의 압박에 시달리던 아이는 실토하면 집에 보내준다는 말에 속아 거짓 시인을 했고, 그길로 형제복지원에 넘겨졌다.

형제복지원은 지옥 자체였다. 겨우 열네살의 최씨는 첫날부터 내리 사흘 동안 소대장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 뒤에도 소대장의 서무로 뽑혀 오랫동안 성유린 대상이 됐다. 눈앞에서 사람이 맞아 죽는 것도 목격했다. 3년 뒤인 1985년에는 동생 재우가 형제원에 들어온 것을 봤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탈출하는 사람들이 나오면서 1986년부터는 바깥세상에 형제복지원의 실상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에 최씨의 아버지도 그해 10월 혹시나 해서 형제복지원을 찾아갔다가 아들 둘을 구출했다.

―복지원에서 나온 뒤에 아버지가 ‘사내자식이 그런 곳에 다녀올 수도 있지, 뭘 그래’라는 식으로 얘기해서 엄청 상처가 되었다면서요?

“엄청난 상처였고, 아버지가 굉장히 원망스러웠죠. 아버지가 거기에 들어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너무 몰라주는 게 힘들고 괴로웠죠. 그런데 지난달 고공 단식농성을 할 때 아버지가 전화를 하셔서 ‘아들아, 아버지가 미안하다’고 하시는 거예요. 제가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전 아버지한테 진짜로 사과받고 싶었거든요.” 그의 눈가는 또다시 촉촉해졌다.

과거사법 통과되면 다른 피해자

트라우마 치료에 도움 주고파

‘부랑아 선도’라는 국가 허가증을 얻었던 형제복지원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강제로 수용해 불법적으로 인권을 짓밟았다. 최승우씨처럼 어린 나이에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던 아이들. 형제복지원 진상규명 대책위원회
‘부랑아 선도’라는 국가 허가증을 얻었던 형제복지원은 1975년부터 1987년까지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강제로 수용해 불법적으로 인권을 짓밟았다. 최승우씨처럼 어린 나이에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던 아이들. 형제복지원 진상규명 대책위원회

형제복지원에서 나온 뒤 가족이나 사회의 따뜻한 손길을 받지 못했던 최씨가 갈 곳은 길거리밖에 없었다. 그는 가출해 형제복지원 출신 아이들과 거리를 떠돌았다. 여자친구를 만나 동거를 하며 정착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최씨의 형제복지원 전력을 알게 된 상대 쪽 부모가 두 사람을 강제로 갈라놓았다. 둘 사이에 난 아이는 입양됐고, 여자친구는 자살했다는 소식을 몇년 뒤 그의 오빠한테 들었다. 최씨는 대한민국을 떠나고 싶어 외항선을 타기도 했으며, 국내에 있을 때는 공무집행 방해죄 등으로 연신 교도소를 들락거렸다. 더 이상 살아갈 의욕을 잃어 극단적인 시도도 여러차례 했다. 자신과 달리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썼던 동생 재우가 끝내 좌절해 2009년 숨지기 직전 ‘형, 정신 차려’라고 한 마지막 말이 그의 차가운 가슴을 찔렀다. 마침내 2012년 시장에서 어묵 장사를 시작하면서 자기 힘으로 일어섰고, 형제복지원 문제도 정면으로 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이 받은 상처뿐 아니라 그가 남들에게 남긴 상처도 풀어야 하는 과제가 있다. 형제복지원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한 몸으로 만들었다. 권력자인 중대장과 소대장, 총무, 서무 등은 모두 피해자인 수용자들이었다. 생지옥에서는 회유나 협박, 생존에 대한 원초적 본능, 알량한 권력욕의 굴레를 피하기가 쉽지 않다. 최씨도 그중 한명이었다. 그는 소대장에게 성착취를 계속 당하는 한편 다른 아동을 성폭행하기도 했다. “저도 피해자였지만, 서무라는 작은 권력자이기도 했어요. 사람들을 두드려 패기도 했지요. 안에서 정말 괴로웠던 것은 소대장이 어린아이들을 성폭행하면서 서무인 저한테도 그 짓을 강요했던 일입니다. 저로 인한 피해자를 아직 만나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제가 진정으로 사과해야 할 부분입니다. 비록 당시에 살아남기 위해서 그랬지만, 그런 부분은 제가 지탄받아야 합니다.”

“고공단식보다 더한 것 각오”

―몸을 다 회복하면 다시 국회 앞으로 가는 건가요?

“당연히 그래야죠. 거기가 우리 집이잖아요. 퇴원할 때까지 법 통과가 안 되면 지붕 위에 단식농성장이 있으니까 다시 올라가거나 무슨 수를 써야겠지요. 저들이 당리당략의 쟁점으로 자꾸 가져가서 법을 만들지 않는다면 마지막 운동 방식이라는 고공단식보다 더한 것도 저는 할 각오가 되어 있어요.”(최씨는 20일 오전 퇴원한 뒤 곧바로 국회 앞 농성장으로 달려갔다.)

―법이 통과된 뒤의 계획은요?

“법이 통과되면 국가가 나서서 진상규명을 하겠죠. 그때 제가 해야 할 일은 뭐냐면, 더 많은 국민에게 사회의 부당함을 알리고, 또 국가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우리 피해 생존자들이 짐승 같은 삶에서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좀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피해 생존자들이 배·보상을 받는다고 트라우마가 없어지지 않거든요. 제가 이렇게라도 사는 것은 2015년부터 ‘트라우마치유센터 사람마음’(이사장 최현정 충북대 심리학과 교수)에서 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 치료가 저한테는 큰 도움이 됐어요. 지난해부터 연극 무대에도 서고 있는데, 인권연극도 계속하고 싶고요.” 피해 보상을 요구하다가 점차 사회의 문제점을 알아가고,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고민까지 하는 인간 진화를 보는 듯해 힘든 내용의 인터뷰였음에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도 순탄치 않은 길을 계속 걸어야 하는 최씨와, 국가가 입힌 상처 속에 아직도 고통받고 있을 수많은 최승우들이 떠올라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phillkim@hani.co.kr, 녹취 이유진

▶김종철: 1989년 기자로 첫발을 내디딘 뒤 정치부, 사회부 등에서 일하다 현재는 토요판팀 선임기자로 현장을 뛰고 있다. 국가나 사회, 민족 등 추상적인 단어보다 그 실질을 이루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람을 더 좋아한다. ‘지금 여기’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여운이 오래가는 기록’을 지향한다. ‘김종철의 여기’는 4주에 한 번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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