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가 ‘활동가를 위한 글쓰기 교실’ 수업을 앞두고 5월30일 오후 서울 용산구 보광동 집에서 화장을 하며 외출 준비를 하고 있다.
에디가 3일 오전 서울의 한 병원에서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비자 발급을 위해 신체검사 순서를 기다리던 중 여자화장실 앞에서 남자화장실 입구를 바라보고 있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6월13일 밤 서울 마포구 지하철 홍대입구역 3번 출구 인근 숲길공원.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를 가사로 삼은 노래가 울려퍼진다. 올랜도 펄스 클럽 총기 사건으로 희생된 50여명을 추모하기 위해 성소수자 수백명이 모인 자리. 트랜스젠더 에디(28)가 눈물을 흘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삶은 초와 같아요. 안간힘을 다해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싸우지만, 결국 저는 닳아 없어지지 않을까요.”
에디에게 올랜도 사건 같은 ‘혐오범죄’는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녀는 혐오와 차별이 부르는 죽음이 가까이 있다고 느낀다. 하루에 수차례씩 1년 동안 200여건의 청소년 성소수자 상담을 해온 에디다. ‘죽고 싶다’는 심경을 토로하는 이들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한해 청소년 200여명
‘죽고 싶다’는 얼굴과 마주한다
“제 삶은 초와 같아요
인권 위해 싸우지만
결국 닳아 없어지지 않을까요?”
혐오와 차별의 벽 넘는
‘담쟁이덩굴 공동체’ 위해
오늘도 싸운다
에디가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에서 상임 활동가로 일하기 시작한 건 1년 전이다. 사무실 자리에 놓인 액자 속에는 2013년 12월24일 자살한 청소년 성소수자 ‘블랙썬’의 사진이 들어 있다. “게이였던 그 친구는 교회가 전부였어요. 하지만 정체성이 드러난 뒤 교회 구성원은 그를 멀리했어요. 하루아침에 모든 친구를 잃었다는 절망감에 약을 먹고 말았죠.” ‘비슷한 죽음을 막고 싶다’는 바람이 그를 상담 활동으로 이끌었다.
자살한 청소년 성소수자 ‘블랙썬’의 사진이 담긴 액자가 1일 오후 서울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사무실에 놓여 있다. 에디는 이 청소년의 자살 이후 성소수자 인권활동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에디가 ‘제17회 퀴어문화축제’를 하루 앞둔 10일 밤 보광동 집 앞에서 자신의 강아지 ‘열이’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렇지만 죽음은 멈추지 않았다. 2015년 11월19일 자살한 청소년 트랜스젠더 ‘크리스’는 사회로부터 거절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고, 정체성을 드러내 활동하는 에디를 유난히 부러워했다. 에디는 그의 장례식장에서 ‘우린 모두 버티고 있는데, 너는 죽겠다는 생각을 실천으로 옮겼구나’란 생각을 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에디도 죽음과 마주한 경험이 있다.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된 정체성 혼란을 지닌 채 2007년 군에 입대했다. 선임들은 ‘여성스러운’ 목소리와 걸음걸이, 그리고 분홍색 수첩과 곰돌이 동전지갑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시비를 걸고 귀싸대기를 때렸다. 2층 내무실에서 창밖으로 집기를 내던지곤 이를 주워 오라며 후임들 앞에서 수없이 모욕을 줬다. 2008년 1월 겨울밤 경계근무를 서던 중 커터칼을 든 채로 숨죽여 울었다. 제 손목을 후벼 파려고 했다. 멀리서 2살 많은 후임이 다가와 말렸다. 달이 유난히 밝았던 밤이었다.
에디가 11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퀴어축제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의 자식이었다. 에디는 부모의 노력과 기대에 부응해야만 했다. 20대 중반까지 ‘아들’, ‘학생’, ‘남자’, ‘군인’ 등의 역할을 놓고 주변 사람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
2011년 봄 에디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잊으려고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오스트레일리아(호주)로 떠났다. ‘다른’ 문화와 제도를 목격했다. 구직 당시 고용계약서 서류의 성별 기입에 남자와 여자 외에 성소수자 표시 부분이 따로 있었다. 에디가 입사한 온라인쇼핑몰 ‘오지 세일’(OZ SALE)은 성소수자를 위해 화장실 공간을 별도로 마련했다. 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배려가 일상인 호주에서 정체성 고민을 끝낸 에디는 2012년 3월 트랜스젠더의 삶을 결정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셋째 조카를 낳고 산풍으로 고생하고 있는 3살 터울의 친언니를 대신해 1년 동안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마두동에서 함께 살며 세 조카를 돌봤다.
퀴어축제 행진 차량 위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는 에디.
6월8일 오후 에디는 경기도 남양주에 사는 언니네 가족을 보러 갔다. “에디다!” 4살짜리 막내 조카 택훈이가 외쳤다. 10살, 9살, 4살이 된 어린 조카들은 ‘이모’ 또는 ‘외삼촌’과 같이 성별이 드러나는 단어가 아닌 이름을 부른다. 언니가 말했다. “우리 첫째는 매우 논리적인 아이, 둘째는 고운 심성을 가진 아이, 셋째는 애교가 많은 아이예요. 다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 아이를 누군 차별하고 누군 사랑한다는 게 말이 안 돼요. 다른 걸 틀렸다고 보는 이 사회에서 어떻게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잡겠어요.” 두 자매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막대사탕을 입에 문 막내 조카가 에디의 품으로 달려와 뽀뽀하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에디는 성소수자 인권 관련 제도에 관심이 많다.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해 출국을 준비하고 있다. 직접 경험해보기 위해서다.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비자 발급 절차에서 서류 과정을 통과한 에디가 6월3일 오전 서울의 한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기 위해 등록신청서와 검사질문지를 작성하며 성별란에 ‘남자’로 기재했다. 에디는 긴장한 눈빛을 보이며, 묻지도 않은 질문에 답하듯 간호사에게 말했다. “제가 트랜스젠더라 여성호르몬 주사를 맞고 있어요. 비자 받는 데 문제없을까요?” 간호사는 문제없다고 답했지만, 에디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현재 뉴질랜드에는 성정체성 차별 금지법이 시행되고 있으며, 1977년 개정 시민권 관련법에 따라 성전환수술 없이도 법적 성별 정정이 가능하다. “한국에 성소수자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정책이 있다면 가족을 떠나 멀리까지 공부하러 갈 필요는 없겠죠. 혐오와 차별을 넘어 모두가 더불어 살 수 있는 공동체가 이 땅에 생기면 더 바랄 것도 없겠어요.” 병원을 나서며 에디가 말했다.
“어머, 나 진짜 이쁘다. 언니 고마워요.” ‘제17회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광장에서 공연을 앞두고 무대화장을 받은 에디가 거울로 얼굴을 확인하며 분장 담당자를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에디의 눈웃음 너머에는 기대감과 긴장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무엇이 에디를 떨리게 한 걸까. ‘퀴어문화축제는 기다려지는 명절….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가 그동안 잘 지켜내 주었다고 서로 보듬어주는….’(에디의 <아이즈> 기고 글 중에서)
에디가 13일 저녁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 숲길공원에서 열린 ‘미국 올랜도 엘지비티 클럽 총격 사건 추모 촛불문화제’에 참석해 촛불을 든 채로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크레이그 바틀릿 목사의 품에 기대고 있다.
에디는 3년 전인 2013년 서울 용산구 보광동으로 이사 오면서 가족으로부터 독립해 트랜스젠더 언니, 게이 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 비가 내리면 습기가 쉽게 차고 곰팡이가 폈다. 에디는 수리비 150만원가량을 써서 집을 고치고 빨간색 멸균 페인트로 내벽을 칠했다. “언니가 ‘이 집 1층이 무당집인데, 그 아래 집 안이 온통 빨간색이면 귀신이 어디로 가겠느냐’고 한마디 했죠. 그래도 빨간색의 따뜻한 느낌 받으며 언니, 동생과 같이 살고 싶어요.” 이 집의 ‘맏형’으로 불리는 트랜스젠더 언니를 통해 화장법 등을 배우며 여성의 삶에 적응할 수 있었다는 에디는 3년 동안 동고동락한 ‘맏형’이 늘 고맙기만 하다.
“퀴어축제는 1년에 한 번 가족들이 만나는 명절 같은 것인데… 언젠가는 ‘매일’ 서로의 얼굴을 보며 살 수 있는 성소수자 공동체 마을을 만들고 싶어요.” 높은 벽을 넘을 수 있는 담쟁이덩굴 같은 공동체를 이루는 것. 에디의 꿈이다.
글·사진 김성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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