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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권·복지

“대기업의 ‘통큰 후원’보다 하루하루 기적같은 손길 소중”

등록 2016-04-07 19:03수정 2016-04-07 21:05

서영남씨. 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서영남씨. 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짬] 무료급식 ‘민들레국수’ 대표 서영남씨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스물두 살의 아들이 수도자의 길을 가겠다고, 수도원에 들어간다고 하자 춤을 출 만큼 기뻐하셨다. 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끈질기고도 오랜 물음 끝에 수사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25년 뒤, 돌연 수도복을 벗었다. 옷 몇 벌과 책 몇 권인 짐을 꾸려 환속했다. 결혼도 했다. 남들은 수군거렸다. 오십 나이에 빈손으로 시작했다. 노숙인들에게 배불리 밥을 먹이고 싶었다. 어려운 이들이 유독 많은 인천 화수동에 국숫집을 열었다. 가난한 이들이 줄서서 식사를 기다리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어 줄을 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오전 10시부터 식당 문을 열었다. 그런데 식당 ‘민들레국수’에는 정작 국수가 없다. 국수로 시작했으나, 국수로는 주린 배를 충분히 채울 수 없기에 한달 뒤부터 밥과 국, 반찬을 준비했다.

국숫집 주인이 된 전직 수사 서영남(62·사진)씨는 환속한 이유를 ‘아프락사스’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는다.

25년 수사의 길 접고 쉰살에 환속
“노숙인들 배불리 먹이고 싶어”
국숫집 열어 13년째 ‘백반’ 대접

어린이 공부방·무료식당·도서관도
‘희망센터’ 통해 노숙인 독서도 권장
“이웃과 더불어 사는 방법 배우도록”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아프락사스는, 알을 깨고 나온 새가 날아가려는 신의 이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가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되듯이, 그는 자신을 둘러싼 수도원이라는 껍질을 깨고 나왔다. 어렵게 나온 속세에서 그가 하는 빈민구제 사업 역시 기존의 틀을 깨고 있다.

국내 대기업의 한 고위 임원이 민들레국수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노숙인들 사이에서 한 끼를 해결한 그는 한 가지 제안했다. 그룹 차원에서 도움을 주겠다고. 하지만 서씨는 미안한 표정으로 거절했다. 날마다 400~500여명에게 해 먹일 쌀이 떨어질까 걱정을 하는 그가 대규모 지원을 거절하자, 그 임원은 개인적으로라도 돕겠다며 달마다 후원금을 보내고 있다.

서씨는 지난 13년 동안 정부 지원금도 한 푼 받지 않았다. 또 돈 많은 독지가의 자선이나 기증도 사양했다. 오직 주변의 자발적인 나눔과 정성으로 식탁을 차려냈다. “굶주림이나 가난의 문제를 국가나 부자들의 비인격적인 자선에 기대지 말고, 서로가 어려운 형제들의 보호자가 되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고 집 없는 이들에게 쉼터를 마련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루하루가 기적’이라고 말한다. 주린 배를 끌어안고 찾아온 ‘브이아이피(VIP) 손님’(그는 노숙인을 그렇게 부른다)들에게 아낌없이 내어드리면 신기하게도 더 많은 것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름을 알리지 않은 수많은 고마운 분들이 쌀 한 포대, 계란 한 판, 김 한 상자, 파 한 단, 라면 한 상자 등을 보내온다. “하느님은 굉장히 장난꾸러기이신 것 같아요. 아무 대책이 없어서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거들어 주세요. 분명히 들어주시긴 하는데, 애간장을 늘 태우시니 말이죠. 허허허.”

그는 민들레국수 근처에 어린이 공부방, 어린이 무료식당, 어린이 도서관, 노숙인 쉼터 등을 마련하는 ‘기적’을 일궜다. 또 2년 전부터는 필리핀에도 세 곳에 민들레국수를 열어 빈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노숙인 쉼터인 ‘민들레 희망센터’에 가면 천원짜리 세 장을 신권으로 준다. 쉼터에 있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서 발표하는 조건이다. 신권은 늘 서씨의 부인(세례명 베로니카)이 준비한다. 노숙인들에게 새 출발의 의지를 심어주기 위한 배려다.

그는 수사 시절 전국의 교도소를 찾아다니며 ‘면회 오는 이’ 한 명 없는 장기수들의 친구가 돼 주었다. 출소자들을 위한 ‘평화의 집’에서 함께 살기도 했다. “가난하거나 소외된 이들의 특징은 억압에 눌려 제대로 자기표현을 못하는 겁니다. 말할 기회도 박탈당했으니까요. 교도소를 찾아가서 갇힌 형제들을 만나며 자기를 표현하고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니 스스로 변하는 것을 느꼈어요.”

노숙인들은 처음에는 돈 욕심에 책을 건성건성 읽고 독후감을 발표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달라져 갔다. 누구도 귀기울여주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니 신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노숙인들은 대부분 혼자 우두커니 지냅니다. 외톨이 버릇입니다. 입도 굳어집니다. 비록 독서 장려금 3천원에 책을 읽기 시작하지만, 혼자의 삶에서 이웃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배웁니다.”

서씨는 찜질방 입장 티켓도 한달에 300장가량 나눠준다. 고급 찜질방에서 할인해 구입한 것이다. 그런데 처음엔 찜질방에서 냄새가 난다며 노숙인들 입장을 거부했다. 쉼터에 있는 샤워시설을 개방해 몸을 씻고 가도록 해서 냄새 문제를 해결했다. 지하상가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서씨의 부인은 헌옷을 말끔하게 수선해 노숙인에게 나눠준다.

민들레국수에는 민간 구호단체에 흔히 있는 후원회도 없다. 800여명의 후원자들은 대부분 5천~1만원의 소액을 자발적으로 낸다. 연말정산 때 세금 혜택도 못 받지만 기꺼이 서씨를 믿고 보낸다.

“진정한 나눔은 자기의 귀한 것을 주는 겁니다. 참다운 사랑은 조건이 없는 밥입니다. 민들레국수 손님들에게 신앙을 강요하거나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밥을 차려주는 이유입니다. 조건을 달면 봉사가 아니거든요.” 최근 자전 에세이집 <하루하루가 기적입니다>(샘터 펴냄)를 낸 서씨가 어려운 이들이 십시일반 보탠 후원금을 더 소중히 여기는 이유다.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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