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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권·복지

아롱진 세월, 촉촉한 사연…‘인생 이모작’ 눈물 줄줄

등록 2015-10-27 20:40수정 2015-10-28 10:26

1.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도심권인생이모작지원센터 배움터에서 강좌 ‘50+ 감성이 번지다’가 열렸다.
1.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도심권인생이모작지원센터 배움터에서 강좌 ‘50+ 감성이 번지다’가 열렸다.
도심권인생이모작지원센터강좌 ‘50+ 감성이 번지다’

“나는 기다립니다. 아이들의 안부 전화를. 나는 기다립니다. ‘괜찮습니다’라는 의사의 말을. 나는 기다립니다. 이 사람이 더 이상 아프지 않기를.” 강사 유경(55)씨가 읽는 그림책엔 단순한 그림과 하얀 여백 사이로 빨간 끈이 이어졌다. “나는 기다립니다. 다시 봄이 오기를. 나는 기다립니다. 아이들이 나를 보러 오기를.” 그리고 마지막 장을 넘기자 ‘삶의 끈을 따라서’라는 문장으로 책은 끝났다. 조용히 듣고 있던 수강생들은 몰래 눈물을 훔쳤다.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도심권인생이모작지원센터 배움터에선 강좌 ‘50+ 감성이 번지다’ 수강생인 50, 60대 남녀 15명이 다비드 칼리의 그림책 <나는 기다립니다>를 감상했다. “강사님께서 그림책을 읽어주시는데 내가 살아온 이야기처럼 느껴져 눈물이 났다”, “임신이 안 돼 고민하던 딸에게 얼마 전 아기가 생겨 온 식구가 기다리고 있는 터라 더욱 가슴 뭉클했다”는 소감이 이어졌다.

이름·고향·청춘 등 10개 테마
그림책 끈으로 추억 술술
‘나는 기다립니다’에 눈물 줄줄

‘내 이름이 담긴 병’ 읽고
이름에 얽힌 숨겨둔 마음 비쳐
누구는 “개명”, 누구는 “운명”

‘이제 와 왜?’가 아니라
터놓고 이야기하며
오래 묵은 응어리 훌훌

어르신 쉼터(데이케어센터)에 근무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 기아무개씨는 “쉼터 어르신의 일상이 기다림 자체임을 경험하면서 장수가 축복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이 커 여러 곳을 거쳐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말했다. “쉼터 어르신 대부분이 80대 후반이신데 오후 서너시가 넘어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집에 가고 싶어 떼를 쓰세요. 그러나 보호자와 약속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늦게 보내야 해요. 집에서 감당할 수 없어 밖으로 밀려나온 분들이 많거든요. 그분들을 다독이면서 내 노후는 어떻게 보낼 것인가 걱정을 많이 합니다.”

그림책 <내 이름이 담긴 병>은 미국에서 이름 때문에 고민하는 은혜의 고민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수강생이 몰입할 수 있었다.
그림책 <내 이름이 담긴 병>은 미국에서 이름 때문에 고민하는 은혜의 고민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수강생이 몰입할 수 있었다.
김문자(60)씨는 “오늘 수업에 참가하기 위해 손녀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바삐 왔다. 내 시간을 더 가지려고 아이를 늦게 데려오려는 마음을 품은 적도 있는데, 기 선생님 이야기를 듣고 많이 반성했다. 앞으로 아이와 시간을 많이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울림이 컸다”고 말했다.

‘그림책과 함께하는 내 인생의 키워드 10’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번 강좌는 모두 10회로 기획되었다. 첫날 키워드는 ‘이름’이었다. 유씨는 최양숙씨의 그림책 <내 이름이 담긴 병>을 읽었다. 미국으로 이민 간 은혜가 자신의 이름 때문에 겪게 되는 고민과 이를 지혜롭게 해결하는 과정이 펼쳐졌다. 변경녀(54)씨는 “그림책에 은혜의 표정이 시각적으로 잘 표현돼서 이야기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며 “나도 개명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 이름 ‘경’ 자가 ‘경사났네’ 할 때 그 ‘경’ 자예요. 얼마나 기쁘면 그렇게 지었겠어요. 좋게 생각하고 성인이 될 때까지 고민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최근 ‘된장녀’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해서 내 이름을 인터넷에서 검색해봤더니 안 좋은 글들이 많더라고요. 인생이 많이 남았으니 이름도 더 희망적인 것으로 바꾸고 싶어 개명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두고 결심만 남겨놓은 상태입니다.”

도심권인생이모작지원센터는 수강생인 50, 60대 남녀 15명의 사진을 즉석카메라로 찍어 ‘나는 전설이다’라는 제목의 나무에 장식했다.
도심권인생이모작지원센터는 수강생인 50, 60대 남녀 15명의 사진을 즉석카메라로 찍어 ‘나는 전설이다’라는 제목의 나무에 장식했다.
이미 개명한 수강생도 여럿이었다. 김아무개씨는 “내가 태어났을 때 발에 점이 있다고 외할머니께서 ‘점’ 자 들어간 이름을 붙였다. 왜 외손녀 이름까지 지어서 나를 평생 고통받게 하셨나 원망을 많이 했다”며 울먹였다. “45살에 이름을 바꾸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국전에도 당선됐다. 인생에서 제일 잘한 게 이름을 바꾼 거였다”고 말했다. 박아무개씨는 “형제 모두 이름 가운데 ‘응’ 자가 들어간다. 언니는 5년 전 개명을 했는데 나는 그냥 살아가고 있다. 누가 부탁을 하면 거절을 잘 못하는 게 이름 탓인 것 같아 많이 속상했지만, 순리대로 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는 할아버지의 뜻을 지금은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강사인 유씨는 “자신이 별거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이렇게 살아남은 것만으로 우리는 최선을 다했고, 존재 자체가 전설이다. 오늘 모임의 부제도 ‘나는 전설이다’로 달았다”며 “앞으로도 오늘처럼 이야기하자. ‘이제 와 그런 이야기를 왜 해?’가 아니라 ‘이름 왜 그렇게 지어주셨느냐’고 원망도 하고 ‘개명이 꿈’이라고 자신을 표현하며 길을 찾아보자”고 말했다. “제 이름을 지어주신 아버지께서 석달 전 돌아가셨어요. 죽음 준비에 대해 10년 넘게 강의를 했는데 육친의 사별은 처음 겪었습니다. 떠나시고 나니까 부모님께 여쭤보지 못한 게 참 많다는 걸 느꼈어요. 우리는 가족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착각하지만 오히려 남보다 더 모르는 것 같아요. 두 분이 어떻게 만나셨는지 이제 어머니께 여쭤볼 수밖에 없는 거죠. 다행히 어머니께서 가까이 사셔서 매일 들러 함께 시간을 보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시비에스>(CBS) 아나운서 출신으로 프리랜서 사회복지사 1호인 강사 유경씨가 그림책 <나는 기다립니다>를 읽어주고 있다.
<시비에스>(CBS) 아나운서 출신으로 프리랜서 사회복지사 1호인 강사 유경씨가 그림책 <나는 기다립니다>를 읽어주고 있다.
강의가 끝난 뒤 “시니어에게 왜 그림책이냐?”고 묻자 유씨는 “그림책은 그림만 봐도 이해가 되기 때문에 나이·성별·국적과 상관없다. 시니어는 자기 이야기를 그냥 하기 참 어려워한다. 그림책은 누구나 쉽게 자기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50+ 감성이 번지다’ 강좌를 기획한 도심권인생이모작지원센터 정현주 주임은 “창업, 취업 등 기술적 교육은 많은데 시니어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아 그림책을 통해 장년층의 마음을 나누려고 이 자리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12월까지 이어지는 나머지 키워드는 고향·부모·청춘·일·추억·식구·떠남·선물·출발이다. 유씨는 “센터와 함께 인생의 중간점검에 필요한 10개의 키워드를 골랐다. 자격증 과정도 아니고 기술을 배우는 강의도 아닌데 남자가 수강생의 절반을 차지해 놀랐다. 50대 이상(50+) 남자분들도 감성을 원하는 것 같다.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마음이 촉촉해졌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글·사진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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