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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권·복지

무뚝뚝한 경상도 아저씨, 소통 말문 터졌다

등록 2015-10-20 20:34수정 2015-11-04 10:33

지난 12일 서울 한남동 시립용산노인종합복지관 4층 정보화교실에서 세이 자원봉사자인 이인욱(가운데)씨와 아내 임계희씨가 미국 예일대 3학년생인 새뮤얼 사우스와 대화하고 있다. 세이는 한국의 어르신이 미국 대학생에게 인터넷 화상통화로 한국어 회화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이다.
지난 12일 서울 한남동 시립용산노인종합복지관 4층 정보화교실에서 세이 자원봉사자인 이인욱(가운데)씨와 아내 임계희씨가 미국 예일대 3학년생인 새뮤얼 사우스와 대화하고 있다. 세이는 한국의 어르신이 미국 대학생에게 인터넷 화상통화로 한국어 회화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이다.
용산복지관 SAY 봉사 이인욱·임계희씨 부부


이인욱(62)씨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다. 30대 중반의 미혼인 두 아들과 마주치면 “식사하셨어요?” “잘 지내냐?” “네”로 대화는 끝이다. 아내 임계희(62)씨는 “남편이 경상도 출신이라 욱하는 기질이 있다. ‘요즘 너 뭐 하고 있냐?’고 묻고는 ‘너는 계획도 없이 그렇게 사냐?’고 잔소리부터 나오니 대화가 이어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최근 달라졌다. 아들의 대답에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한번 해봐”라고 격려해 옆에서 듣던 임씨가 깜짝 놀란 것이다.

미국 대학생과 인터넷 화상통화
한국어 회화 돕고
다양한 경험과 인생 얘기는 덤

툭하면 욱하던 아들과의 대화도
마음 트고 토닥토닥
부부도 공통 주제 생겨 알콩달콩

“너 이상하다, 종북좌파 아니냐”
친구들이 말할 정도로
사회를 보는 눈과 생각도 열려

그 변화는 이씨가 지난해 9월 서울 한남동 시립용산노인종합복지관의 ‘세이’(SAY·Seniors And Youth) 1기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면서 시작됐다. 세이는 한국의 어르신이 미국 대학생에게 인터넷 화상통화로 한국어 회화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이다. 대화를 시작할 때만 해도 “22, 23살짜리 아이들이 뭘 알까 생각했다”는 이씨는 1년여가 지난 지금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깊이 생각하는 데 놀랐다. 세상 살아가는 방법을 거꾸로 배우고 있다”며 한국의 젊은이까지 다시 보게 됐다. 아내 임씨는 “남편이 젊은이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면서 아들까지 다시 보게 된 것 같다. 세이에서 하는 말투가 가정의 일상적 대화에도 전염되고 있다”고 좋아했다.

지난 9월 시작한 세이 3기부터는 프린스턴대와 함께 예일대 학생도 참가하고 있다. 대학생 16명과 어르신 16명이 일대일로 12월까지 매주 한번씩 대화를 나눈다. 지난 12일 복지관 4층 정보화교실에서는 이씨가 예일대 3학년생인 새뮤얼 사우스와 화상통화 중이었다. 새뮤얼은 ‘샘’, 이씨는 ‘맥스’로 불렸다.

맥스: 아저씨는 지도 보는 거 좋아해. 지구본 가져다 놓고 마음으로 상상하면서 여행을 가는 거야.

샘: 인터넷에도 정보가 많아서 어디든 정보를 찾을 수 있고 많이 배울 수 있어요.

맥스: 그렇지. 직접 갔다 온 여행기를 보면 내가 직접 다녀온 것처럼 착각을 일으켜. 지금 샘이랑 얘기하는데 바로 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잖아.

샘: 예. 진짜 신기한 거예요. 멀리 떨어진 맥스 아저씨와 이렇게 대화할 수 있으니까요.

맥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 하하하.

한국에서 2년간 선교활동을 했던 새뮤얼이 유창한 한국말로 “많이 경험하신 맥스 아저씨가 한국말 도와주시고, 한국 문화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으니까 저는 진짜 고마운 거예요”라고 말하자 이씨는 “샘이 고맙게 생각하니까 맥스 아저씨도 참 고마워. 숙제하느라 바쁠 텐데 나랑 이야기해줘서 감사해요”라고 답했다.

세이 2기부터 자원봉사자로 동참하고 있는 아내 임씨는 “한국어 중급 이상 학생 중에서 선발되기 때문에 문법은 제법 알지만 회화는 연습할 기회가 드문 학생들이 시니어와 대화하면서 다양한 경험과 인생 이야기를 듣고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9일 한글날에 대화를 나눈 제이크 앨버트는 ‘한국에 가보니 젊은이들이 영어가 적힌 티셔츠만 입고 다니더라. 세종대왕이 이렇게 아름다운 한글을 만들었는데 한국 젊은이들은 그 가치를 모르는 것 같다’고 말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몰라요.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제이크는 졸업한 뒤 좋아하는 댄스 일을 하겠대요. 부모님은 자신의 선택이 무엇이든 존중하고 지지한다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 들으면 취직으로 고민하는 한국의 대학생과 부모가 겹쳐지면서 느끼는 게 참 많았어요.”(임계희씨)

부부가 세이를 같이 해서 좋은 점은 공통된 주제가 있다는 점이다. 세이에서 나눴던 이야기를 집에서도 하게 된다. 이씨는 “퇴직한 친구들 대부분 아내와의 대화를 힘들어한다. 공통 화제가 없으니 뭘로 시작할지 막막한 것이다. 우리 세대가 어려운 게 마누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거다. 지지는커녕 ‘집에서 나한테나 잘해’ 식으로 태클만 안 걸어도 좋겠다고 한다”고 말했다.

재무설계사인 임씨는 “퇴직한 남자 고객과 상담해보면 대부분 남편과 비슷하다. 직장이라는 폐쇄된 조직 안에서 살다가 은퇴 준비 없이 나와 삶의 목표도 없이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평소 자원봉사 안 하다가 퇴직한 뒤 갑자기 하려니 어디서, 어떻게 하는지 몰라 시작도 못해요. 제가 세이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 세대간 소통, 인문학 체험, 정보기술 활용 등 남자의 자원봉사로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강력히 추천했는데 다행히 남편이 착해서 제 말을 잘 따라했어요. 경상도 남자를 착하게 만드는 게 쉽지 않은데, 제 코치 기술을 아시겠죠? 호호.”(임계희씨)

경상도 출신인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을 그 누구보다 기뻐했던 이씨는 고향 친구들로부터 “너 요즘 이상해졌다. 종북좌파 아니냐”는 말을 자주 듣는다. 봉사활동을 한 뒤로 “성장, 성취, 출세 위주로 살아왔던 세상과 환경이 이제 달라지고 있다. 성장에서 복지로, 성장에서 성숙으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기 때문이다. “한국 남성이 변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변화하려면 두려운데, 가만히 있으면 편하고 익숙하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세이는 참 좋은 프로그램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는 법을 익힐 수 있잖아요. 저는 이제 어떤 사람을 만나도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이인욱씨)

글·사진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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