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2일 서울 중구 남산골한옥마을 국악당에서 열린 ‘2015 실버문화축제’에서 보람할매연극단이 연극 ‘흥부네 박 터졌네’를 공연하고 있다.
흥부네 가족이 박을 타며 노래를 불렀다. “박이로구나 박. 슬근슬근 톱질하세. 이 박을 타거들랑 아무것도 나오지를 말고 쌀밥 한 톨만 나오너라. 얼씨구나 절씨구야.” 마침내 갈라진 박에서 튀어나온 건 과자였다. 배우들이 객석에 과자와 사탕을 집어던지자 관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흥부 마누라는 바로 앞에 앉아 있던 심사위원들에게 뻥튀기를 건넸다. 관객석은 웃음으로 뒤집어졌다.
2년전 어로1리 어르신들 한글 공부
문해교육 교사 제안으로 연극 시작
5분짜리 대본도 겨우 외워 무대 올라
지역에 소문나면서 행사에 초청받아
30분짜리 ‘흥부네 박 터졌네’ 도전
“긴 대사 외우느라 진짜 박 터질 뻔”
지난해 경북연극대회서 최우수상 수상
첫 서울 무대도 3년 경력이면 거뜬
땅콩도 못뽑고 새벽밥 먹고 올라와서
능청스런 연기로 관객들 휘어잡아
지난 2일 서울 중구 남산골한옥마을 국악당에서 ‘2015 실버문화축제’가 열렸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원연합회가 주관한 이번 행사에서 지난 9월부터 대구를 시작으로 수원, 서울, 광주, 부산, 대전 등 6개 지역에서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18개팀이 경연을 펼쳤다. 공연 부문 대구·경북 대표로 참가한 보람할매연극단은 연극 ‘흥부네 박 터졌네’를 선보였다. 경북 칠곡군 북삼읍 어로1리 60~80대 할머니 13명으로 구성된 연극 동아리다. 평균 나이 75살인 시골 할매들의 능청스런 연기에 관객들은 감탄했다.
무대에서 내려온 배우들에게 “떨리지 않았냐”고 묻자 “떨리긴. 공연을 몇 번이나 했는데. 무대에 원캉 많이 올라가니까 하나도 안 떨려”, “대사도 하나 안 틀렸어. 다 잘했어”라고 답했다. 그러자 연출을 맡은 황인정씨는 “내가 보기엔 틀렸는데 왜 안 틀렸다고 해요. 마지막에 ‘흥부네’ 하면 다 같이 ‘박 터졌네’ 하고 인사해야 하는데, 그냥 ‘차렷, 인사’ 해버렸잖아요”라고 지적했다. “어쨌든 인사는 했잖아” 하며 다들 신경 안 쓰는 눈치다. 뻥튀기를 심사위원에게 준 전일수(흥부 마누라 역)씨는 “원래 대본에는 없었어. 오늘이 얼마나 좋은 날이야. 그래서 심사위원에게 줬어”라고 말했다.
2.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보람할매연극단의 최영순·백두리·오성주·김정자·정송자·전일수·김소순·정순임·장병학·최순자·송문자·박옥순·황인정씨.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지원하는 성인문해교육 교사인 황씨는 2013년 3월 어로1리에 부임했다. 마을회관에서 일주일에 두 번 한글을 가르쳤다. 그해 10월 성인문해교육 받는 마을들의 백일장대회가 열렸다. 장기자랑을 준비해야 하는데 전통가요나 춤같이 식상한 건 하기 싫었던 황씨가 조심스럽게 직접 쓴 각본 하나를 내놓았다. 고 권정생 작가의 동화 <훨훨 간다>를 연극으로 올리자는 제안이었다. 뜻밖에도 할매들의 반응은 선선했다. “그래, 해보지 뭐.” 배우마다 대사 두 마디씩밖에 없는 5분짜리 연극이었지만 ‘이름 석자만 겨우 아는’ 할매들이 대사를 외우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황씨가 읽어주면 따라하는 식으로 계속 들어 외워 나갔다. 구렁이 역을 맡은 박옥순씨는 “우리가 선생님을 잘 만났어. 성도 안 내고 잘 가르치고 연하고. 대사도 몸동작도 다 알켜주고 우리는 그냥 따라해. 대사는 지 앞에 당한 것만 외우지 나머지는 몰라 가지고 얼마나 힘이 들었는데. 입에 익어야 그마치 하지”라고 말했다.
농사짓는 틈틈이 준비한 공연이 끝나자 시골 할매들이 연극을 했다는 소문이 났다. 주위에서 ‘다음 작품은 뭐냐’며 관심을 보이고 각종 행사에 초대했다. 지난해에는 흥부전을 각색한 30분짜리 ‘흥부네 박 터졌네’에 도전했다. 그 대목에 이르자 할매들은 “대사 외우느라 진짜 박 터질 뻔했다”, “정신이 깜빡깜빡하고 오늘 들은 얘기도 내일 가면 까먹는데 그 긴 대사를 어찌 외우겠노”, “정신없는 노인네들 때문에 선생님이 애를 잡샀어” 각자 힘들었던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다.
공연 초기에는 대사에다 동선까지 까먹어 ‘이리로 들어가라면 저리로 들어가던’ 할매들이 공연을 거듭할수록 여유를 찾기 시작했다. 지난해 9월 열린 경북 평생학습축제 연극대회에서는 최우수상까지 받았다. 까막눈 어르신들이 글을 배워 연극을 올린 노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황씨는 “대부분 시·군 단위에서 연극을 하지 마을(리) 단위에서 연극하는 동아리는 우리가 유일한 걸로 알고 있다”며 “오늘 주최측에서 7분으로 줄여달라고 해서 그렇지 30분짜리 하면 다들 넘어가요. 놀부 박도 터져야 하고 재미있는 거 다 빠졌어. 이렇게 줄여서 짧게 하는 거 우리 할매들 싫어해요”라고 하자 할매들도 “끝까지 다 해야지. 완전한 작품을 보면 참말로 우스워. 배꼽 쥐고 넘어져요”라고 장단을 맞췄다. 보람할매연극단이 지역의 명물이 되면서 마을을 찾아오는 손님도 많아졌다.
“지난해에는 대학생들이 와서 마을회관에서 사흘간 자고 갔어. 재료 가져와서 연극 옷이랑 전부 다 해놓고 갔어. 손자 손녀 같고 즐겁고 좋아. 예의 바르고 인정스럽고 어떻게나 잘하던지. 대학생들도 할무이하고 같이 하니 좋다고 캐. 시골에 전부 노인뿐인데 대학생들이 오니까 얼마나 좋아.”(박옥순씨)
지금까지 경북지역 행사만 다녔던 보람할매연극단이 서울로 올라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새벽 6시에 마을회관에서 모여 전세 낸 버스를 타고 올라왔다. 박씨가 “연극하니까 좋아. 작대기 짚고 다니는 할매들이 연극하니까 바깥구경 하잖아. 평생 이런 데 와보겠어?”라고 하자 다른 할매들이 “오늘 차비랑 밥값이 부족해 노인회 경비까지 풀고 난리 났다”, “점수가 잘 나와야 돼. 상 꼭 타야 한다. 땅콩도 안즉 안 뽑고 새벽밥 먹고 왔는데”라고 걱정을 했다. 행사가 끝난 뒤 황씨가 문자를 보내왔다. ‘저희 2등 최우수상 받았습니다!’ 칠곡으로 내려가는 버스 안 풍경이 절로 떠올랐다.
글·사진 원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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