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 임금님과 백성은 서로 ‘덕분이옵니다’라고 인사를 했어요. 여러분도 부모님께 ‘덕분이옵니다’라고 꼭 하세요.” 송정열 이야기 할머니가 지난 9월23일 서울 노원구 청원유치원 어린이에게 ‘어진 임금님과 농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야기 할머니’ 5기 송정열씨
“즐거운 이야기 들어 보아요. 생각을 키우는 옛날이야기. 친구들 친구들 잘 들어 보아요. 자세를 멋지게 들어 보아요.”
지난 9월23일 서울 노원구 청원유치원에 송정열(63) 이야기 할머니가 나타나자 어린이들이 율동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오늘 들려줄 이야기는 ‘어진 임금님과 농부 이야기’예요. ‘어진’이란 말뜻을 아나요?” 이야기 할머니가 묻자 누군가 “방을 어질러요”라고 답했다.
평생 외동딸·손자 뒷바라지만 하다
2년전 도전한 이야기 할머니에 합격 1년간 교육, 매달 이야기 외워 발표
가족 도움받아 모노드라마식 연습
이제는 1년에 30개도 거뜬히 암기 매주 유치원 3곳서 수업 10회 진행
시청각에 무차별 노출된 어린이들
조손 무릎 교육으로 상상력 되살려 “아니에요. 백성을 사랑하고 나랏일을 잘하시는 분을 어진 임금님이라고 해요. 풍년이 들면 백성은 ‘임금님 덕분이옵니다’라고 하고, 임금님은 ‘백성 덕분이옵니다’라며 서로 고맙다고 인사를 했어요. 뒤에 선생님이 서 계신데 우리 다 같이 해볼까요? 우리가 유치원에 와서 잘 지낼 수 있는 것은 모두 선생님 덕분이옵니다.” 아이들은 이야기 할머니를 따라 배꼽인사를 하며 선생님께 “덕분이옵니다”를 외쳤다. “어때요? 기분 좋아졌죠? 집에 가면 건강하게 키워주신 부모님께 ‘제가 유치원에 잘 다니는 것은 모두 부모님 덕분이옵니다’라고 꼭 하세요.” 이야기 할머니는 한국국학진흥원이 2009년부터 여성 어르신을 교육해 유아교육기관에 강사로 파견해온 사업이다. 할머니가 무릎에 손자녀를 앉히고 이야기를 들려줬던 조손 교육을 현대적으로 부활하자는 취지다. “진흥원에서는 가능하면 그림 없이 말로만 이야기하라고 해요. 요즘 아이들은 눈만 뜨면 게임, 비디오 등 시청각에 너무 많이 노출돼서 상상력이 부족하거든요. 목화꽃이나 참빗처럼 아이들이 상상하기 힘든 것은 개인적으로 준비할 때도 있지만, 귀로만 듣고 상상하게 만드는 게 원칙입니다.” 상상력을 자극하니 효과는 바로 드러났다. 부모를 잃은 형제의 우애를 다룬 ‘형제와 잉어’ 이야기를 마쳤을 때다. “한 아이가 아주 진지한 얼굴로 질문을 했어요. ‘할머니, 형제가 착하게 사니까 돌아가신 엄마, 아빠가 구슬을 잉어 뱃속에 넣어주신 게 아닐까요?’ 깜짝 놀랐어요. 아이들이 이렇게 상상을 잘하는구나.” 송씨는 일주일에 집 근처 유치원 세곳에 수업하러 간다. 한곳에서 20분짜리 수업을 서너 반씩 한다. 활동비는 진흥원에서 지급하는데 한달에 30만~40만원 정도다. “수업을 막상 해보니 체력이 달려요. 목을 아끼기 위해 도라지, 생강 등 목에 좋은 차를 항상 갖고 다닙니다. 또 품위 유지비가 장난 아니게 들어요. 저는 가능하면 한복만 입는데 같은 옷을 두번만 입어도 ‘왜 또 입고 왔어요?’ 하는 아이들이 있어요. 그래도 정말 고맙죠. 딸도 ‘우리 엄마가 직장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해요.” 송씨는 이야기 할머니가 평생 첫 직업이다. 30년 동안 외동딸 뒷바라지에 온 힘을 다했고, 10년 전부터는 맞벌이 딸네를 대신해 두 손자의 양육을 전담해왔다. 어느덧 ‘마음을 내려놓고 늙어가던’ 2년 전 신문에서 이야기 할머니 기사를 보았다. “사회생활 경험이 전혀 없어서 내가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어요. 그런데 딸이 용기를 줘서 일단 원서를 넣었죠. 아름다운 추억으로 끝나도 고마울 것 같다는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아무런 경력도 없는 제가 1차 서류전형에서 덜컥 붙은 겁니다.” 600명을 모집하는 데 2차 면접에만 2500명이 나섰다. 면접장에 도착하자 평생 처음 접하는 열기에 주눅이 들었다. 경력이 쟁쟁한 경쟁자들 사이에서 평생 살림만 해온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면접에 가보고 합격은 턱도 없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5월13일 최종 합격자 명단에 제 이름이 있는 게 아니겠어요. 제5기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송정열 합격! 정말 행복한 날이었고, 인생의 축복 같은 선물이었어요.” 합격했다고 바로 활동을 시작하는 건 아니었다. 2박3일의 신규교육을 받았고, 6번의 월례교육이 이어졌다. 제시된 10개의 이야기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한달 동안 달달 외워 다음 교육 때 발표해야 했다. “외우다가 이야기가 한번 끊어지면 다시 떠올리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60살이 넘으면 매일 기억하는 세포는 하나씩 죽고, 삐치는 세포는 하나씩 는다’는 말도 있잖아요. 단순히 내용만 외우는 게 아니라 중요한 대목은 아이들에게 강조해야 하는 게 정말 어려웠어요.” 여럿이 대화하는 장면이 있으면 실감나게 하려고 모노드라마처럼 연습했다. 옆집에 시끄러울까 추운 날에도 옥상에서 연습했다. 다른 이야기 할머니들 앞에서 발표하니 자존감까지 걸려 있어 초긴장 상태였다. “마지막 월례교육 때 ‘제주도 김만덕 할머니’ 이야기를 했어요. 제주도민들이 배를 기다리며 대화하는 장면에서 몰입하다 문득 앞을 보니 할머니들이 다 웃고 계신 거예요. 깜짝 놀라 왜 웃냐고 물었더니 정말 실감나게 해서 웃었다고 하더군요. 선생님도 칭찬하셔서 정말 기분 좋았어요.” 지난해 3월 첫 출근을 앞두고 초등학교 교사인 딸은 “처음부터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충 외우면 시작부터 꼬일 수 있다고 철두철미하게 준비시켰다. “저에게는 딸이 최고의 선생님이자 길 안내자죠. 1년에 모두 30개의 이야기를 외워야 하는데 처음에는 이걸 어떻게 외우나 막막했어요. 진흥원에서는 교육만 성실히 받으면 다 된다고 하던데 진짜 되더라고요. 열정과 긍정적인 생각, 무엇보다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글·사진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2년전 도전한 이야기 할머니에 합격 1년간 교육, 매달 이야기 외워 발표
가족 도움받아 모노드라마식 연습
이제는 1년에 30개도 거뜬히 암기 매주 유치원 3곳서 수업 10회 진행
시청각에 무차별 노출된 어린이들
조손 무릎 교육으로 상상력 되살려 “아니에요. 백성을 사랑하고 나랏일을 잘하시는 분을 어진 임금님이라고 해요. 풍년이 들면 백성은 ‘임금님 덕분이옵니다’라고 하고, 임금님은 ‘백성 덕분이옵니다’라며 서로 고맙다고 인사를 했어요. 뒤에 선생님이 서 계신데 우리 다 같이 해볼까요? 우리가 유치원에 와서 잘 지낼 수 있는 것은 모두 선생님 덕분이옵니다.” 아이들은 이야기 할머니를 따라 배꼽인사를 하며 선생님께 “덕분이옵니다”를 외쳤다. “어때요? 기분 좋아졌죠? 집에 가면 건강하게 키워주신 부모님께 ‘제가 유치원에 잘 다니는 것은 모두 부모님 덕분이옵니다’라고 꼭 하세요.” 이야기 할머니는 한국국학진흥원이 2009년부터 여성 어르신을 교육해 유아교육기관에 강사로 파견해온 사업이다. 할머니가 무릎에 손자녀를 앉히고 이야기를 들려줬던 조손 교육을 현대적으로 부활하자는 취지다. “진흥원에서는 가능하면 그림 없이 말로만 이야기하라고 해요. 요즘 아이들은 눈만 뜨면 게임, 비디오 등 시청각에 너무 많이 노출돼서 상상력이 부족하거든요. 목화꽃이나 참빗처럼 아이들이 상상하기 힘든 것은 개인적으로 준비할 때도 있지만, 귀로만 듣고 상상하게 만드는 게 원칙입니다.” 상상력을 자극하니 효과는 바로 드러났다. 부모를 잃은 형제의 우애를 다룬 ‘형제와 잉어’ 이야기를 마쳤을 때다. “한 아이가 아주 진지한 얼굴로 질문을 했어요. ‘할머니, 형제가 착하게 사니까 돌아가신 엄마, 아빠가 구슬을 잉어 뱃속에 넣어주신 게 아닐까요?’ 깜짝 놀랐어요. 아이들이 이렇게 상상을 잘하는구나.” 송씨는 일주일에 집 근처 유치원 세곳에 수업하러 간다. 한곳에서 20분짜리 수업을 서너 반씩 한다. 활동비는 진흥원에서 지급하는데 한달에 30만~40만원 정도다. “수업을 막상 해보니 체력이 달려요. 목을 아끼기 위해 도라지, 생강 등 목에 좋은 차를 항상 갖고 다닙니다. 또 품위 유지비가 장난 아니게 들어요. 저는 가능하면 한복만 입는데 같은 옷을 두번만 입어도 ‘왜 또 입고 왔어요?’ 하는 아이들이 있어요. 그래도 정말 고맙죠. 딸도 ‘우리 엄마가 직장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해요.” 송씨는 이야기 할머니가 평생 첫 직업이다. 30년 동안 외동딸 뒷바라지에 온 힘을 다했고, 10년 전부터는 맞벌이 딸네를 대신해 두 손자의 양육을 전담해왔다. 어느덧 ‘마음을 내려놓고 늙어가던’ 2년 전 신문에서 이야기 할머니 기사를 보았다. “사회생활 경험이 전혀 없어서 내가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어요. 그런데 딸이 용기를 줘서 일단 원서를 넣었죠. 아름다운 추억으로 끝나도 고마울 것 같다는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아무런 경력도 없는 제가 1차 서류전형에서 덜컥 붙은 겁니다.” 600명을 모집하는 데 2차 면접에만 2500명이 나섰다. 면접장에 도착하자 평생 처음 접하는 열기에 주눅이 들었다. 경력이 쟁쟁한 경쟁자들 사이에서 평생 살림만 해온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면접에 가보고 합격은 턱도 없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5월13일 최종 합격자 명단에 제 이름이 있는 게 아니겠어요. 제5기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송정열 합격! 정말 행복한 날이었고, 인생의 축복 같은 선물이었어요.” 합격했다고 바로 활동을 시작하는 건 아니었다. 2박3일의 신규교육을 받았고, 6번의 월례교육이 이어졌다. 제시된 10개의 이야기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한달 동안 달달 외워 다음 교육 때 발표해야 했다. “외우다가 이야기가 한번 끊어지면 다시 떠올리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60살이 넘으면 매일 기억하는 세포는 하나씩 죽고, 삐치는 세포는 하나씩 는다’는 말도 있잖아요. 단순히 내용만 외우는 게 아니라 중요한 대목은 아이들에게 강조해야 하는 게 정말 어려웠어요.” 여럿이 대화하는 장면이 있으면 실감나게 하려고 모노드라마처럼 연습했다. 옆집에 시끄러울까 추운 날에도 옥상에서 연습했다. 다른 이야기 할머니들 앞에서 발표하니 자존감까지 걸려 있어 초긴장 상태였다. “마지막 월례교육 때 ‘제주도 김만덕 할머니’ 이야기를 했어요. 제주도민들이 배를 기다리며 대화하는 장면에서 몰입하다 문득 앞을 보니 할머니들이 다 웃고 계신 거예요. 깜짝 놀라 왜 웃냐고 물었더니 정말 실감나게 해서 웃었다고 하더군요. 선생님도 칭찬하셔서 정말 기분 좋았어요.” 지난해 3월 첫 출근을 앞두고 초등학교 교사인 딸은 “처음부터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충 외우면 시작부터 꼬일 수 있다고 철두철미하게 준비시켰다. “저에게는 딸이 최고의 선생님이자 길 안내자죠. 1년에 모두 30개의 이야기를 외워야 하는데 처음에는 이걸 어떻게 외우나 막막했어요. 진흥원에서는 교육만 성실히 받으면 다 된다고 하던데 진짜 되더라고요. 열정과 긍정적인 생각, 무엇보다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글·사진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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