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30일 서울 서대문구치매지원센터에서 ‘경도 인지장애’가 있는 70, 80대를 위한 ‘지혜아카데미’가 열렸다. 경도 인지장애는 일상생활은 가능하지만 인지기능과 기억력이 심하게 떨어진 상태로, 방치하면 치매로 옮겨갈 가능성이 크다.
경도 인지장애 돕는 ‘지혜아카데미’
“여러분, 이 노래 제목이 무엇인지 잘 들어보세요.” 손경옥(63), 강래현(60) 지혜교사가 음악을 틀었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첫 소절이 시작되자마자 누군가 “타향살이?” 하고 정답을 말했다. “와, 잘하셨어요. 아시는 분은 따라 부르셔도 돼요.”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년에 청춘만 늙고…’ 입속에서 웅얼거리던 소리는 박자를 타며 합창으로 합쳐졌다.
인지ㆍ기억력 떨어진 7080 어르신
경도 인지장애는 치매 될 확률 높아
5060 베이비붐 세대가 교육 나서 옛 노래 부르며 뇌ㆍ신체 자극
고향 이야기로 과거 추억 불러내
마트 전단지로 물건 선택ㆍ계산 실습 집 방문학습은 대기자만 10여명
서울 서대문ㆍ마포 집단학습 확대 “이 노래 다들 아시죠? 여기서 ‘타향’이라는 건 뭘까요? 그래요. 고향이 아닌 데를 타향이라고 하죠. 서울이 고향이신 분 계세요? 어릴 때 뭐 하고 사셨어요?” “농사짓고 살았지. 벼도 베고, 콩도 심고….” 한 사람이 대답하자 조용히 있던 사람들도 말문이 트였는지 어릴 때 기억을 와글와글 쏟아냈다. 7월30일 서울 서대문구치매지원센터에서 ‘지혜아카데미’가 열렸다. ‘경도 인지장애’가 있는 70, 80대 9명이 참가했다. 경도 인지장애는 일상생활은 가능하지만 인지기능과 기억력이 심하게 떨어진 상태로, 방치하면 치매로 옮겨갈 가능성이 크다. 이날은 지혜아카데미 자문위원장인 이영란 서울여자간호대 교수가 참석해 수업을 참관했다. 이 교수는 “어르신이 알 만한 추억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건 옛 기억을 끌어내고 긴장감을 풀 수 있어 좋다. 노래에는 박자와 동작이 있어 뇌와 신체 모두 활용할 수 있다. 1절, 2절 가사의 순서까지 있어 기억력, 언어 능력, 수행 능력까지 향상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타향살이 노래가 끝난 뒤 타향과 고향에 대한 사건을 묻는 것도 좋았다. 인지장애가 있는 분들에게는 새롭고 추상적인 것을 가르치는 것보다 과거의 추억을 끄집어내는 게 맞다”고 덧붙였다. “어르신은 고향이 어디세요? 전북 순창요. 거기 뭐가 유명하죠? 고추장이 유명하죠. 거기서 무슨 농사 지으셨어요? 벼농사 지었어요.”
두 교사의 진행에 대해 이 교수는 “질문의 수가 많은 것보다 하나의 대답에서 연상을 이어가는 게 낫다. 순창에서 고추장을 연상한 어르신에게 고추장으로 만들었던 요리 등 연계성 있는 기억을 꺼내는 게 더 좋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두 교사는 도화지와 가위, 풀 등을 하나씩 나눠줬다. “여러분, 도화지 제일 위에 날짜와 이름을 적어주세요. 오늘이 몇 년 몇 월 며칠 무슨 요일이죠?” 한명씩 돌아가면서 묻자 대부분 정확하게 대답했지만, 짜증을 내며 답하기를 거부하는 어르신도 있었다. 이 교수는 “날짜를 어려워하는 분에게는 계절을 물어보는 식으로 작은 것이지만 성취감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손 교사는 동네 마트의 광고 전단지도 한장씩 나눠줬다. “오늘 싸게 파는 게 많네요. 저는 목이 말라서 수박을 사야겠어요. 어르신도 사고 싶은 것을 잘라서 도화지에 붙여주세요. 다 붙인 뒤에는 물건값을 더해서 총액을 적어주세요.”
두 교사의 안내를 받아 어르신들은 광고지에서 사고 싶은 물건의 사진을 오려냈다. 치매지원센터 직원과 도우미까지 나서 도왔다. 물건을 오려 붙이는 건 쉬웠지만 마지막 가격 계산이 어려웠다. 몇몇은 욕심껏 많이 붙이는 바람에 교사들도 계산기를 동원할 정도였다.
이 교수는 “흔한 광고지를 교구로 활용해 어르신이 욕구를 바탕으로 선택과 계산을 하게 한 건 정말 훌륭했다. 가격이 너무 커서 계산이 어렵다면 5000원을 주고 사고 싶은 것을 고르게 하면 어떨까. 계산 대신 재료를 골라 요리를 하는 것도 오감을 자극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에 물건을 선택한 이유까지 물어보았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물건에 얽힌 기억을 발표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변화할 수 있는 게 집단학습의 장점”이라고 조언했다.
서울인생이모작지원센터는 지난해 지혜아카데미 시범교육에 이어 올 2월부터 서울 중구, 서대문구, 마포구, 금천구에서 방문학습교육을 진행해왔다. 120시간의 교육을 이수한 25명의 지혜교사가 2인 1조를 이뤄 경도 인지장애 어르신의 가정을 방문해 인지기능을 유지할 수 있게 돕고 있다. 집단학습교육은 올 4월 서대문구에서 시작했다. 처음에는 4명만 등록했지만 지금은 1명의 탈락자도 없이 15명으로 늘어났다.
강 교사는 “자기가 살고 있는 형편을 노출하는 것을 꺼리는 어르신들이 많더라. 처음에 방문학습교육을 나가면 문 열어주는 것부터 힘들어한다”고 말했다. 손 교사는 “집에서는 ‘머리가 아프다’, ‘잠을 못 잤다’ 핑계를 대며 수업을 기피하는 분들이 많다. 반면에 여기에 오는 분들은 집을 나설 때 이미 공부할 준비가 된 분들이라 수업 분위기가 훨씬 좋다. 신체활동이 가능한 분이라면 단체교육이 효과적일 것 같다”고 말했다.
5060 베이비붐 세대 중에서 5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뽑힌 지혜교사는 은행원, 사업가, 간호사, 학습지 교사 등 다양한 경력을 갖고 있다. 강 교사는 어린이에게 미술을 가르쳐왔고, 유치원 교사였던 손 교사는 어린이 인형극을 지도한 적도 있다. 두 교사는 지혜아카데미에서 자신의 경력을 활용해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강 교사는 “젊은이들이 실습하러 가끔 오는데 자기네 용어로 빠르게 말하니까 어르신이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다”며 “우리는 어르신과 같은 시대를 경험한 세대라 공감에서 나오는 배려가 가장 큰 장점인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방문학습교육은 63명이 받고 있지만, 교사 수가 부족해 10여명의 신청자가 대기하고 있는 상태다. 서울인생이모작지원센터는 교사 수의 한계로 방문학습교육을 더 늘릴 수 없는 형편이다. 대신 집단학습교육을 마포구 등으로 확대하고 있다. 올해 교육은 오는 10월에 끝내고, 지혜교사를 새롭게 모집한 뒤 내년 초부터 교육을 다시 시작할 예정이다.
글·사진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경도 인지장애는 치매 될 확률 높아
5060 베이비붐 세대가 교육 나서 옛 노래 부르며 뇌ㆍ신체 자극
고향 이야기로 과거 추억 불러내
마트 전단지로 물건 선택ㆍ계산 실습 집 방문학습은 대기자만 10여명
서울 서대문ㆍ마포 집단학습 확대 “이 노래 다들 아시죠? 여기서 ‘타향’이라는 건 뭘까요? 그래요. 고향이 아닌 데를 타향이라고 하죠. 서울이 고향이신 분 계세요? 어릴 때 뭐 하고 사셨어요?” “농사짓고 살았지. 벼도 베고, 콩도 심고….” 한 사람이 대답하자 조용히 있던 사람들도 말문이 트였는지 어릴 때 기억을 와글와글 쏟아냈다. 7월30일 서울 서대문구치매지원센터에서 ‘지혜아카데미’가 열렸다. ‘경도 인지장애’가 있는 70, 80대 9명이 참가했다. 경도 인지장애는 일상생활은 가능하지만 인지기능과 기억력이 심하게 떨어진 상태로, 방치하면 치매로 옮겨갈 가능성이 크다. 이날은 지혜아카데미 자문위원장인 이영란 서울여자간호대 교수가 참석해 수업을 참관했다. 이 교수는 “어르신이 알 만한 추억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건 옛 기억을 끌어내고 긴장감을 풀 수 있어 좋다. 노래에는 박자와 동작이 있어 뇌와 신체 모두 활용할 수 있다. 1절, 2절 가사의 순서까지 있어 기억력, 언어 능력, 수행 능력까지 향상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타향살이 노래가 끝난 뒤 타향과 고향에 대한 사건을 묻는 것도 좋았다. 인지장애가 있는 분들에게는 새롭고 추상적인 것을 가르치는 것보다 과거의 추억을 끄집어내는 게 맞다”고 덧붙였다. “어르신은 고향이 어디세요? 전북 순창요. 거기 뭐가 유명하죠? 고추장이 유명하죠. 거기서 무슨 농사 지으셨어요? 벼농사 지었어요.”
지혜아카데미가 끝난 뒤 강래현(왼쪽부터)·손경옥 지혜교사가 이영란 교수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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