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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권·복지

실직하면 ‘전시’, 가족은 ‘병참’… 퇴직을 숨기지 마세요

등록 2015-07-21 19:32수정 2015-07-22 14:09

 ‘재도약 프로그램’ 수강생이었던 김진인(오른쪽)씨가 지난 8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재도약 프로그램에서는 강사로 나섰다.
‘재도약 프로그램’ 수강생이었던 김진인(오른쪽)씨가 지난 8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재도약 프로그램에서는 강사로 나섰다.
중장년 구직자 ‘재도약 프로그램’
“다들 잠깐 눈을 감아 보세요. 눈을 감은 채 손으로 북쪽을 가리켜 보세요.”

지난 8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 컨벤션센터에 모인 중장년 10여명은 강사의 지시에 따라 손을 뻗었다. 전경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의 ‘재도약 프로그램’에 참석한 수강생들이었다. 재도약 프로그램은 중장년 구직자가 중소·중견 기업에 성공적으로 재취업할 수 있도록 3일 동안 취업능력과 자신감을 향상시키는 행사다.

“그 상태로 눈을 떠보세요. 방향이 어떻습니까? 다 제각각이죠. 이처럼 엉뚱한 방향으로 지금도 달리고 계신지 모릅니다. 조금 느려도 상관없어요. 방향만 맞으면 더 빨리 갈 수 있습니다. 속도보다 방향이 더 중요합니다.”

강사는 몇 년 전 재도약 프로그램에 수강생으로 참여했던 김진인(56)씨다. 김씨는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뒤 일본 기업 등을 거쳐 국내 대기업 계열사에서 해외법인장과 사업팀장까지 역임했다. 2011년에는 ‘사장이 되어 보란듯이 성공하고 싶어’ 시스템개발 인력공급업체를 창업했다.

“처음엔 후배들 찾아다니며 부탁하니까 마지못해 한 명씩 써주더군요. 그런데 이 업종도 경쟁이 점점 치열해져 이익이 박해졌습니다. 파견한 사람이 사고라도 치면 제가 메꿔야 했어요. 자금난이 오면서 마음이 조급해지니까 기술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돈이 많이 남는 사람을 소개하게 되는 겁니다. 실력이 달리고 근태도 좋지 않은 사람을 파견하게 된 거죠. 그러고 나서 나중에 찾아가면 사람 또 써주겠습니까? 그제야 돈만 좇아 후배들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대기업 해외법인장까지 거친 김진인씨
퇴직 뒤 시스템개발 인력공급업체 창업
자금난에 후배들에게 몹쓸짓하다 파산
‘재도약’ 수강뒤 야간경비하며 생각바꿔

가족에게 상황 털어놓고 도움 청해
과거 지위·명성 잊고 ‘내 분야’ 찾아
성과 중심으로 일하니 도움 요청 쇄도
“이제는 내가 일을 선택… 재미 알아”

중장년 구직자들이 강의를 듣고 있다.
중장년 구직자들이 강의를 듣고 있다.
창업 1년 반 만에 파산했다. 대기업 경력의 자만과 자부심은 절망과 좌절로 바뀌었다. 사장까지 했는데 다시 사원으로 취업하는 게 창피하게 느껴졌다. 다른 업종을 기웃거렸다. 음식점, 구멍가게, 건강보조식품까지 들여다봤지만 50대 남자가 할 만한 것은 없었다.

“재취업에 나서면 과거의 경력을 사려는 회사들이 있을 겁니다. 옛 인맥을 활용해 고객을 물어오고 매출을 올릴 것을 요구하는 거죠. 과거 인맥을 총동원해 1년치 목표를 겨우 달성하면 다음해에는 두 배를 요구할 겁니다. 무슨 수로 그걸 달성합니까? 그런 회사는 여러분의 단물만 뽑아낸 뒤 바로 ‘팽’합니다. 그렇게 당하신 분들이 주위에 많아요.”

수강생 중 한 명이 “속도보다 방향이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다”며 “강사님은 그 방향을 어떤 쪽에서 찾았냐”고 물었다.

“저도 재도약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뭐 할까, 어떻게 하지, 왜 하지, 이런 순서로 생각을 했거든요. 우선 재취업해야지 생각했고, 그래서 이력서를 200곳 넘게 넣었어요. 그런데 재도약 프로그램에서는 거꾸로 왜부터 먼저 생각하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제가 왜 취업을 하려고 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겁니다.”

김씨는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집 근처 주상복합아파트의 경비원을 6개월 동안 했다. 저녁 7시에 출근해서 아침 7시에 퇴근하는 올빼미 생활이었다. 자연히 사람들과 술자리도 가질 수 없었다. 조용한 새벽 시간을 이용해 그동안의 인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야간경비를 하면서 생각을 곰곰이 해봤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난 것 같은데 왜 나를 아무도 안 뽑아줄까? 냉정하게 자신을 분석하고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고민했습니다.”

나만의 강점과 약점, 내가 처한 상황, 환경과 기술의 변화, 기회와 위기 등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쪽지에 적어 벽에 붙였다. 하고 싶은 것, 하지 말아야 할 것, 꼭 해야 하는 것으로 다시 분류했다. 여러 날에 걸친 작업을 통해 가족에게 지금 상황을 사실 그대로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처음엔 말을 꺼내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생활은 어렵다. 절약할 건 절약하고 줄일 건 줄이자. 중고등학생이었던 아이들한테도 학원을 못 보내니 너희가 알아서 공부해라. 대학교도 등록금만 줄 수 있으니 나머지는 직접 벌어서 해결해야 한다고 했어요. 솔직히 아이들은 알아듣지 못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알아서 공부하더니 지금 대학교 다니고 있습니다. 학비가 없으면 휴학해서 학비 벌어 다니더라고요. 회사에서 퇴직당한 걸 가족에게 숨기지 마세요. 지금은 전시 상황입니다. 병참이 무너지면 전쟁터에 나가 봐야 죽습니다. 고통을 가족과 함께 나누시면 지금 고비를 충분히 넘어갈 수 있어요.”

김씨는 취업에 대해서도 발상을 전환했다. 과거의 지위나 명성에 기대지 않기로 했다. 높은 급여 대신 성과급으로 보상받는 것으로 기준을 바꿨다. 월급쟁이가 아니라 동업자라는 마음가짐을 가진 것이다.

“시스템개발 분야에는 정부나 공공기관의 50억 이상 대형 프로젝트가 많습니다. 입찰에 성공할 수 있도록 사업의 방향을 잡고 전략을 짜는 컨설팅 업무가 저에게 잘 맞겠다 싶었어요. 후배들이 무대에서 빛나도록 저는 뒤에서 조명기사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니 의외로 할 일이 많더군요.”

2~3개월 단기 계약을 맺고 200만원대 월급에 성과가 날 때만 성과급을 받는 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전남 나주에 가서 500억짜리 공공프로젝트 입찰업무를 컨설팅했다. 고용하는 회사 입장에서도 부담이 적어 지금은 여러 곳에서 제안이 들어오고 있다.

“이제는 돈보다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인지 먼저 봅니다. 그런 일을 하면 일도 쉽고 재미가 있더라고요. 조직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니 기존 직원의 견제 등 피곤할 일이 없습니다. 경영진 입장에서도 나이 많은 사람이 회사에 들어오면 여러 가지 신경 써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서로 편하죠. 소문이 나니까 여러 곳에서 찾아와 도와달라고 합니다. 그 전에는 저를 선택해달라고 여기저기 찾아갔는데, 지금은 선택권을 제가 쥐고 있습니다.”

글·사진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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