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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권·복지

반려자 잃은 상실감, 블로그에서 위로·용기 얻었어요

등록 2015-04-28 19:58수정 2015-04-29 01:46

지난 17일 서울시청 지하 시민청 태평홀에서 ‘내 인생의 무한도전, 세상을 바꾸는 시니어’가 열렸다. 마지막 강연자로 나선 황수현씨가 자신의 인생이모작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다.  서울인생이모작지원센터 제공
지난 17일 서울시청 지하 시민청 태평홀에서 ‘내 인생의 무한도전, 세상을 바꾸는 시니어’가 열렸다. 마지막 강연자로 나선 황수현씨가 자신의 인생이모작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다. 서울인생이모작지원센터 제공
시니어 파워블로거 황수현씨

연단에 올라서는 다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얼굴은 하얗게 질린 듯했다. 여린 목소리로 강연을 시작했지만, 극도의 긴장감에 결국 말을 잇지 못했다.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100여명의 청중이 보내는 응원에 황수현(63)씨가 다시 말을 이었다.

“얼마 전까지 제 삶은 가을날 혼자 떨어져 있는 낙엽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잎을 무성하게 피워내는 푸른 나무처럼 싱싱하고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내며 살고 있습니다.”

지난 17일 서울시청 지하 시민청 태평홀에서 ‘내 인생의 무한도전, 세상을 바꾸는 시니어’가 열렸다. 서울인생이모작지원센터가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연 이번 행사에서 4명의 강연자가 자신의 인생 이모작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황씨는 마지막 강연자였다.

“저는 20대에 ‘네 인생을 책임지겠다’는 한 남자의 말을 믿고 그에게 인생 전부를 맡겼습니다. 전업주부로 살면서 자신이 없었어요. 18년 동안 한 아파트에 살면서 사귄 친구가 2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예기치 못한 이별이 찾아올 때까지 한 가정의 주부로 그 역할만 충실히 하면서 살고 있었죠.”

결혼 뒤 집에서 육아·가사 전념
1999년 의지하던 남편 죽음에 절망
딸 위로 덕에 엄마 자리 깨달아
3년 만에 세상 밖 도전, 방송대 입학

배운 글쓰기가 아까워 블로그 개설
댓글로 소통하며 새로운 세상 경험
2013년 블로그어워드 최우수상 받아
동병상련 퇴직자들 멘토링하며 보람
“혼자가 아닙니다. 다시 용기 냅시다”

시니어 파워블로거 황수현씨.
시니어 파워블로거 황수현씨.
1999년 3월11일 집에서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직원은 ‘놀라지 말라’며 ‘남편이 사무실에 쓰러져 있어 응급실로 옮겼다’고 했다. 입대를 앞두고 있던 아들과 급히 병원으로 향했지만, 마지막 인사도 나눌 수 없었다. 사인은 급성 심장판막증이었다. 슬픔에 빠질 여유도 없이 차용증과 내용증명이 여기저기서 밀려왔다. 육아와 가사에 전념했기에 세상 물정도 모르고 경제 개념도 없어 망연자실했다. 공장과 사무실을 처분하며 이 세상에 혼자 남았음을 절감했다. 한 사람에게 인생 전부를 맡겼기에 상실감은 몇 년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어느 가을날 발밑에 떨어진 노란 은행잎을 바라보고 있자니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시간은 나와 관계없이 흘러가고 있었어요. 먼 훗날 다시 이 시간을 돌아보면 같은 생각을 반복하고 있을 거 같았죠. 더 이상 미루지 말자. 진정으로 원하는 내 모습을 찾자. 용기를 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이 글쓰기 공부였습니다.”

2002년 한국방송통신대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려워 졸업에 필수적인 출석수업에만 나갔다. 교실에서도 눈을 마주치기 싫어 구석에 앉아 칠판만 응시했다. 그렇게 배운 글쓰기는 치유의 시작이 되었다. 2011년 시니어 누리집인 유어스테이지를 알게 되면서 블로그를 개설했다. 블로그 이름은 ‘풍경소리’로 정했다.

“잔잔한 바람이 불면 처마 밑에서 고운 소리로 마음을 다독이는 풍경소리처럼 일상을 풀어가고 싶었습니다. 며느리와 나누었던 대화를 소재로 첫 글을 썼어요. 첫 글이 올라가자 첫 댓글이 달렸습니다.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마음이 느껴졌어요. 처음 느끼는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마흔아홉살까지 집에만 있던 저였고 항상 남편이 그 시간을 함께했어요. 이별한 뒤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막막해하던 제게 블로그는 세상과 이어주는 통로가 되어주었습니다.”

블로그 ‘풍경소리’는 2013년 대한민국 블로그 어워드 문화·예술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녀만의 시각이 담긴 역사와 유물, 불교미술에 대한 심도 있는 이야기가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2년 남짓 블로그 활동을 했을 때라 글도 130여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다른 파워블로거와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심사위원들께서 시니어가 하는 블로그니 일단 읽어나 보자는 마음으로 살펴보셨다 합니다. 이럴 때는 시니어라는 사실이 훨씬 유리한 것 같아요. 시니어라 마냥 불리한 것만은 아닙니다.”

시상식에서 딸은 “지난 세월은 아빠가 주고 가신 선물이라 생각하세요”라고 말했다. 14년 전 딸에게서 받은 카드가 생각났다. 남편 장례식이 끝나자 아들은 군대에 갔다. 딸과 단둘이 고통을 이겨내야 했다. 엄마를 위로하기 위해 딸은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해 12월24일 화장대에 장미꽃과 카드가 놓여 있었다. 남편 대신 딸이 남긴 것이었다. ‘1년이 거의 지나갔어요. 앞으로 10년도 금방 갈 것 같아요. 10년 뒤에는 엄마의 활짝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요.’ 그 카드를 들고 한없이 오열했다.

“아내의 자리를 잃었지만, 엄마의 자리가 남아 있구나, 엄마가 바로 서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아이들도 절망하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제대로 설 수 있었습니다. 그때 생각이 나 또 울었어요. 그런데 딸은 정작 그 글귀를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글을 쓰면서 받은 위로를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 앙코르스쿨 멘토링 수업을 들었다. 고용노동부 생애재취업과정 수강생의 멘토로 활동할 기회가 주어졌다. 회사에서 강제로 내쫓긴 퇴직자들은 자신과 몹시 닮아 있었다.

“호텔 매니저 출신의 수강생은 3년째 실업 상태였는데, 지금 자신은 아내의 힘으로 버티고 있다고 했어요.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 너머로 제가 느꼈던 공포가 보였습니다. 전업주부로만 지내온 제가 사회로 나갈 수 있을까? 블로그를 통해 제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던 것처럼 그분들에게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자신이 소중해서 무너뜨릴 수 없어서 버텼더니 지금 행복한 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사랑해 주세요, 제발 용기를 내세요.”

황씨는 여전히 떨리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로 강연을 매조졌다. “저는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박수 소리가 강연장을 채웠다. 그가 얼마나 큰 용기로 사회에 나왔고, 연단에 섰는지 이해했다는 듯 먹먹한 울림이었다.

황씨는 강연이 끝난 뒤 기자에게 문자를 한 통 남겼다. “제게 사랑을 주고 떠난 사람이 있어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고요. 햇살 환한 봄날 마음에 담으시기 바랍니다.”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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