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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권·복지

구조조정 전문가 ‘노년 개척자’로 삶을 구조조정하다

등록 2015-04-21 19:59수정 2015-04-22 10:37

유니버설 디자인은 인간 삶의 평등한 권리를 위한 디자인이다. 지난 10일 서울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함께 36.5 디자인’ 전시회에서 만난 한주형 ㈔50플러스코리안 회장은 “다양한 삶의 방식과 상황을 고려한 맞춤형 디자인을 통해 차이를 극복하고 함께 나아가는 공진의 사회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인간 삶의 평등한 권리를 위한 디자인이다. 지난 10일 서울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함께 36.5 디자인’ 전시회에서 만난 한주형 ㈔50플러스코리안 회장은 “다양한 삶의 방식과 상황을 고려한 맞춤형 디자인을 통해 차이를 극복하고 함께 나아가는 공진의 사회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주형 50플러스코리안 회장
지난 10일 서울시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개관 1주년 기획전시인 ‘함께 36.5 디자인’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한 무리의 중학생이 입장하자 조용한 전시관이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전시 물품에는 별 관심 없는 양 돌아다니던 남학생들이 주목한 것은 탈것이었다. 휠체어 등 각종 보행기에 올라 전시장을 신나게 누볐다.

이 전시회를 기획한 ㈔50플러스코리안의 한주형(56) 회장은 “연령과 신체적 조건에 맞게 의지해온 탈것을 통해 인간의 성장과 여정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보행기→유모차→자전거→도시형 교통수단→특수이동수단→이동보조기구→시니어 이동기구가 원을 이루며 전시되어 있었다.

“여기 원의 시작에는 태어나서 혼자 걸을 수 없는 유아가 첫발을 디디도록 도와주는 보행기들이 있죠. 원의 마지막에는 나이가 들어 신체의 기능이 쇠퇴할 때 쉽게 일어서고 안정적으로 걸을 수 있게 해주는 시니어 이동기구가 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이지만 탈것들 중에선 가장 닮은 것 같지 않나요? 이렇게 원으로 배치해서 그 둘이 닿아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다른 쪽에는 각종 유니버설 디자인 제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처음에는 노인과 장애인이 불편하지 않게 생활하도록 시작됐다. 지금은 나이·성별·국적·언어 등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사용하기 편리한 디자인으로 확장돼 ‘보편적 디자인’, ‘모든 사람을 위한 디자인’이라 불린다.

“손이 떨리는 어르신에게 가벼운 숟가락이 좋을까요? 아닙니다. 무거운 숟가락이 낫겠죠. 구글에서 개발한 스마트 숟가락(작은 사진)을 보세요. 수전증이 있는 사람을 위해 손떨림 방지 기술을 넣었는데 상당히 무겁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는 게 유니버설 디자인입니다.”

미국서 경영학 전공, 한국에 M&A 전도
기러기아빠로 살며 일에만 몰두

2004년 아내의 갑작스런 암 선고
수술날이 하필 결혼 20주년 기념일
‘삶의 하프타임’ 깨닫고 가족 곁으로

우연히 만난 교수 덕에 노년학 입문
한국은 노년층보다 50대 문제 더 심각
AARP 같은 50대 이상 커뮤니티 만들어
“상처 딛고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한 회장은 국내의 대표적인 인수합병(M&A) 전문가였다. 1996년 뉴욕시립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고 엘지그룹의 인수합병 담당 팀장으로 스카우트됐다.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곳곳에서 인수합병과 구조조정이 일어나고, 국외 인수합병 전문가들도 한국으로 몰려들었다. 정신없던 와중에 자녀는 다시 미국에서 공부하기를 원했다. 2000년 아내와 자녀가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기러기아빠 신세가 됐다.

2004년 인생의 방향을 돌려놓는 사건이 벌어졌다. 아내가 잠시 귀국해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갑상선암이 발견된 것이다. 급히 수술 날짜를 잡았지만 바쁜 업무로 그는 수술 현장도 지키지 못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내는 수술을 마치고 잠들어 있었다. 문득 달력을 보았다. 12월21일, 결혼 20주년 기념일이었다.

“스포츠용어 중에 하프타임이라고 있잖아요. 경기시간을 전후로 나눴을 때 중간의 휴식시간 말입니다. 하프타임을 알리는 경종이 울리는 느낌이었어요. 더 이상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삶의 우선순위를 바꿔야겠다 생각했습니다.”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의 가족 옆으로 돌아갔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친구도 만났다. 어느 날 “뭘 하고 싶냐”는 질문을 받았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알던 분인데, ‘뭘 할 거냐’가 아니라 ‘뭘 하고 싶냐’고 묻더라고요. 그 질문을 듣는데 멍한 겁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고민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거죠. 없다고 답하기도 뭐해서 즉흥적으로 어려운 아이나 어르신을 위한 일에 관심이 있다고 둘러댔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반색하며 좋은 분을 소개해 주겠다는 겁니다.”

며칠 뒤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의 노년학 교수이자 학과장을 만났다. 경영학을 전공한 뒤 인수합병과 구조조정 등 사업만 해왔다고 자신을 소개하자 학과장은 이렇게 말했다. “고령화는 비즈니스다.(Aging is business.)” 학과장의 권고로 2006년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노년학은 다양한 학문분야가 어우러진 융복합 학문이다. 유니버설 디자인도 공부했다.

“공부를 하면서 미국의 진짜 시니어를 만나고 싶었어요. 현장을 보고 싶어 여러 시니어 기관에 자원봉사를 신청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자원봉사자도 신청한다고 무조건 되는 게 아니더군요. 몇 번 떨어진 뒤에야 겨우 합격했습니다.”

어르신 쉼터(데이케어센터)와 호스피스 병동 등 여러 시설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너싱홈이라 부르는 노인 전문 요양시설에서 옴부즈맨을 맡았을 때다. 세세한 것까지 점검하게 했다. 점심식사로 닭고기가 나온다면 닭고기를 안 먹는 노인을 위한 대용식은 나오는지, 걸음이 불편한 노인이 넘어지지 않도록 복도에 물기는 없는지, 치매를 앓는 노인이 들어가지 않도록 청소함 문은 닫혀 있는지 등을 점검했다.

“한정된 인력으로 꾸려가다 보면 습관적으로 일을 하게 되니까 다른 시각으로 어르신의 삶을 개선해나가자는 취지입니다. 문제를 지적하는 게 아니라 개선하자는 거죠. 이렇게 중요한 업무까지 자원봉사자에게 맡기기 때문에 아무나 신청한다고 받아주지 않는 겁니다.”

노년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2008년 교보생명의 노년 전문위원으로 다시 한국에 들어왔다. 그러나 속도가 더디고 계통이 복잡한 대기업이 답답해서 2010년 퓨처모자이크연구소라는 1인 연구소를 만들어 독립했다. 강연과 컨설팅을 다니면서 한국은 노년층도 문제지만 베이비부머 세대의 문제가 더 심각함을 깨달았다.

“50대는 직장생활뿐만 아니라 인생도 전환점입니다. 여성은 갱년기, 남성도 큰 신체적 변화를 겪을 시기죠. 그런데 베이비부머 세대를 위한 제도도, 정책도, 방향성도 없이 온전히 소외된 상태였습니다.”

그때 떠올린 게 4000만명의 회원을 보유한 미국은퇴자협회(AARP)였다. 한국에도 50대 이상의 모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털어놓자 8명이 모였다. 1000만원씩 십시일반 모아 2013년 ㈔50플러스코리안을 발족했다.

“50대 이상의 권익보호도 있지만 우선 한을 풀자는 생각입니다. 회사에서 받은 배신감, 주체하지 못하는 분노, 뭘 할지 모르는 당혹감 등 상처가 많아요. 우리 사회는 노년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봅니다. 노후에 수억원 없으면 당장 큰일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거든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와 위기는 곧 기회입니다. 새로운 변화의 시대에는 50대 이상이 주역이 될 것입니다.”

글·사진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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