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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권·복지

마을의 최반장 늘.청씨, 1인자립경제 실현하다

등록 2014-12-16 20:21

문래동 예술촌 마당발 최영식씨
은행지점장 퇴직 뒤 마을에 관심
철공소 옥상 텃밭을 주민의 허브로
각종 모임·협동조합·사회적기업 참여
교통·식사값 안 드니 자급자족 가능
자신만의 은퇴준비법 강의도 나서
4:3:3 시간관리에 연락처 구조조정
“인생2막에 맞는 명함부터 갖춰야”
지난 5일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3가 대안공간 이포에서 작가와 철공소 사람들의 협업전시 ‘내용증명’이 열렸다. 벽면을 가득 채운 문래동 주민들 중 맨 윗줄 오른쪽 사진이 최영식씨다.  원낙연 기자
지난 5일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3가 대안공간 이포에서 작가와 철공소 사람들의 협업전시 ‘내용증명’이 열렸다. 벽면을 가득 채운 문래동 주민들 중 맨 윗줄 오른쪽 사진이 최영식씨다. 원낙연 기자
5일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3가 철공소 거리 골목길의 대안공간 이포 전시장을 찾았다.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와 철공소 사람들의 협업전시 ‘내용증명’(<한겨레> 10월22일치 24면)이 시작하는 날이었다. 박지원 프로젝트 예술감독은 전시회 안내문에서 “철공단지의 생태계와 자생적인 예술촌의 공존, 공생에 주목해 수집하고 채집한 삶의 증거들을 예술적 행위의 결과물로 내놓았다”고 밝혔다. 수집하고 채집한 증거 중 하나가 최영식(60)씨의 삶이었다. 전시장에 전시된 각종 지도, 사진, 등기부등본 등의 자료 속에 어머니의 유품인 낡은 서책이 있었고,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주민 사진들 속에 그의 얼굴이 있었다.

하지만 최씨는 25년 전 문래동 아파트로 이사 온 뒤로 20년 동안은 이 마을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은행 지점장이었던 그는 지점이 있던 지역에만 온 관심을 쏟았다. 잠을 자는 공간에 불과했던 마을이 그의 삶에 처음 들어온 건 퇴직하고 몇 달 뒤인 2011년 봄이었다.

“처음 퇴직할 때만 하더라도 처음으로 시간의 주인이 된 것 같아 참 즐거웠습니다. 인생 1막은 부모님의 시나리오대로 컨베이어벨트에 올라타서 그대로 흘러왔잖아요. 그런데 은퇴하고 조금 지나니 넘쳐나는 시간들이 고민이 되더군요. ‘60살부터 80살까지 잠자는 시간을 빼고 남는 8만시간이 공포’라는 말이 절로 이해가 갔습니다.”

그때 집 근처 갤러리 겸 카페인 ‘솜씨’에서 ‘작가와 주민이 함께하는 와인교실’이 열렸다. 같이 수업을 듣던 수강생들과도 자연히 친해졌는데, 어느 날 젊은 미술작가 한 명이 ‘철공소 옥상에 텃밭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의기투합한 작가, 주민, 대학생들이 주변 철공소들을 섭외하기 시작했다. 쓰레기가 잔뜩 쌓인 채 방치된 옥상의 사용을 겨우 허락받았다. 쓰레기를 치우는 데만 100만원이 넘게 들 정도였다. ‘문래도심텃밭’이 문을 연 건 5월5일 어린이날. 예술가, 철공소 직원, 주민들이 어울려 늦은 밤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 뒤로 격주 토요일마다 농사 워크숍을 열었다. 아파트 주부들은 아이의 손을 잡고 옥상에 올라왔다. 채소 상자를 분양받아 키우는 철공소도 생겨났다. 이듬해 문래도심텃밭을 책임지게 된 최씨는 진짜 주민이, 문래동은 진짜 마을이 되어갔다.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비결을 여쭤보시는 분들이 많은데, 스며들듯이 살았던 것 같아요. 여기서도 연장자인 철공소 아저씨들 앞에서 젊은 작가들이 맞담배 피우는 것 때문에 말이 많았는데, 저는 생각을 바꿨어요. 담배와 술이 기호식품인데 그렇게 격식을 따질 필요 있나요? 제 호칭도 ‘늘 청년이고 싶다’는 의미에서 ‘늘.청씨’로 불러달라고 하고, 마을에서 일이 있으면 제가 나서서 잡일을 맡습니다. 전시회 있으면 꽃꽂이와 설거지도 하고 심부름도 자청해요. 그렇게 지내다 보니 세대차도 못 느끼게 되었고, 딸에 대한 이해도 늘어난 것 같아요.”

현재 최씨는 마을에서 온갖 감투는 다 쓰고 있다. 노을공원 살리기 시민모임 발기인으로 나선 게 인연이 되어 서울환경운동연합 집행위원이 되었고, 우리동네 햇빛발전소 협동조합 설립을 위한 창립위원도 맡았다. 사회적기업인 사단법인 예술과마을네트워크의 감사, 예비 사회적기업인 ㈜안테나의 이사, 이야기채록사 협동조합의 이사까지 겸하고 있다.

지난해 봄 철공소 옥상 문래도심텃밭에서 주민들이 풍년을 기원하는 시농제를 가졌다. 최영식씨 제공
지난해 봄 철공소 옥상 문래도심텃밭에서 주민들이 풍년을 기원하는 시농제를 가졌다. 최영식씨 제공
“마을에서 놀면 큰돈이 안 들어요. 일단 교통비가 안 들죠. 온갖 모임과 회의에 참석하니 식사도 해결됩니다. 제가 목표로 하는 게 ‘1인 자급자족 경제’인데 지금 거의 실현하고 있어요. 각종 회의비에 도시농업이다 인생이모작이다 마을공동체다 요청받는 강의까지 하면 매달 50만~100만원 수입은 되는 것 같아요. 최근에는 문래동 마을여행 가이드까지 하고 있습니다. 허허.”

최씨는 “은퇴자들은 여유시간의 과잉에 어찌할 바를 모르기 십상이어서 시간관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자신의 시간을 4:3:3으로 배분하고 있었다. 4는 의미가 있되 여가 같은 일에 투자한다. 아무리 가치가 있어도 재미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게 원칙이다. 3은 가사분담과 가족소통이다. “은퇴자의 가장 중요한 노후대책은 아내”라고 주장하는 그는 “요리를 배우는 등 집안일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고, 가족 채팅방을 만들어 가족과 공동 관심사를 공유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머지 3은 취미생활과 건강관리다. 최씨는 작가들에게 연필화와 목공을 배우고, 옥상텃밭을 가꾸고 등산모임을 통해 건강을 챙기고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4는 줄어들 것이고 그만큼 뒤의 3:3 비율을 늘려가야 한다. 최씨는 또한 “은퇴와 동시에 인적 네트워크부터 구조조정해야 한다”며 “은퇴하면 가장 먼저 명함부터 바꾸라”고 조언했다.

“제가 은퇴하면서 전화기에 저장해뒀던 연락처를 정리해보니 공적 이해관계 그룹 > 조금 친근한 그룹 > 매우 친밀한 그룹 > 가족 그룹 순이더군요. 이 부등호를 매우 친밀한 그룹과 조금 친근한 그룹 쪽으로 바꿔야 인생 2막의 인간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 거죠. 저는 은퇴하면서 제 자신을 표현하는 명함부터 바꿨습니다. ‘느리고 단순한 삶’을 의미하는 ‘느.단한 삶 최영식’이라고 찍은 명함을 갖고 다녔어요. 퇴직한 직장 명함을 내미는 게 아니라 2막에 맞는 자기정체성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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