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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권·복지

[뉴스AS] ‘박원순 논란’…“성서대로라면 이혼도 자위행위도 정죄해야”

등록 2014-12-10 17:11수정 2022-08-18 17:21

[뉴스 AS]
‘동성애 안수’ 인정 미국 장로교단 한인 목사의 편지
“성서는 당대 체제·문화의 산물…가부장제 지키려 동성애 금지”
“하나님 성품은 ‘자비’…편견 깨는 데 만남과 대화만한 것 없어”

8일 ‘동성애 지지하지 않을 자유가 성립할 수 없는 이유’라는 제목의 ‘더(the) 친절한 기자들’ 기사를 보내드린 적이 있습니다. SNS를 중심으로 많은 분들이 공유해주시면서 때로는 공감을, 때로는 비판을 더해 논쟁이 확산했습니다. 적지 않은 노력을 통해 한국 사회 보편성의 한 자리를 차지해가던 ’동성애 등 성소수자의 인권‘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선 것처럼 보였습니다. 논쟁으로 드러난 남루한 현실이 2014년 한국 사회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사가 나간 이튿날인 9일 아침 노트북을 열었더니, ‘성소수자 반대할 자유가 없다는 기사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이메일이 한 통 도착해 있었습니다. 미국장로교단(Presbyterian Church USA) 소속 한인 목사라고 하시더군요. 미국장로교단은 한국에 기독교를 전파한 적도 있는 미국 최대의 장로교단으로, 3년 전인 2011년 동성애자가 성직에 임명될 수 있도록 ‘동성애자 안수 제한 조항’을 삭제했습니다. 지난 8월 221차 총회에서는 성직자들의 동성결혼 주례를 허가하고, 교단규례집에 명시된 결혼의 정의도 ‘한 남성과 한 여성’의 결합에서 ‘두 사람, 전통적으로는 한 남성과 한 여성’의 결합으로 바꿨습니다. 동성 간 결혼이 공식적으로 허용된 것입니다.

편지에는 “그로 인해 많은 진통을 겪었고, 특히 교단 소속 한인교회들은 큰 반발을 해서 교단을 떠난 교회들도 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기독교적 관점에서 동성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는 점도 알아두시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기사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편지를 쓰게 됐다’고 했습니다.

편지 내용이 여러모로 의미가 깊어, 목사님께 기사화하고 싶다고 허락을 구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동성애 지지하지 않을 자유가 성립할 수 없는 이유’ 2탄 정도가 되겠습니다. “별것 아닌 것을 기사로 하신다니 부끄럽다. 맞춤법이나 말이 안 되는 것은 알아서 수정하라”고 하셔서, 전문을 그대로 싣기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편지 글에 저의 설명을 붙이는 식으로 풀어서 썼습니다.

내용을 소개하자면, 한국의 다수 개신교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서에서 동성애를 죄로 정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편지는 “먼저 구약성서를 보면, 남성과 남성이 성관계를 하는 것에 대한 언급은 있으나 여성과 여성의 관계는 전혀 언급이 없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도 분명히 레즈비언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여러 문화권에서 발견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편지는 “이는 두 가지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첫째, 게이는 가부장적 사회체제에 큰 혼란을 초래하기 때문에 정죄했을 것이라는 추론입니다. 갑자기 남성이 여성의 위치로 전락한다는 것은 가부장적 체제를 뒤흔드는 행동입니다. 이것은 마치 “옛날 미국이 흑인을 차별하던 때, 흑인과 백인이 연애하는 것을 반대했던 것과 똑같은 논리”입니다. 흑인과 백인이 연애를 하게 되면, 당시의 기준으로 백인보다 ‘하위 인종’으로 여겨지던 흑인이 백인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게 되면서 차별을 공고히 해온 시스템에 균열이 생기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백인과 흑인이 평등한 인종으로 대등한 지위의 한 인간이라는 사실이 보편화한 지금에 이르러서는 백인과 흑인, 황인과 백인, 황인과 흑인의 결합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체제가 이를 위기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견주어 생각하면, ‘동성애에 대한 정죄’ 역시 성서가 쓰인 시대의 체제와 문화의 산물이라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둘째, “고대 유대인들은 난자와 정자가 만나 생명이 시작된다는 과학적 이해가 없었고, 단순히 정자에서 생명이 나온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정자를 생명 탄생과 상관없이 흘리는 행위는 살인행위라 믿었”습니다. 창세기 38장에 보면, 형수와 성관계를 했다가 형의 자녀를 임신하는 것을 싫어한 동생이 질외사정을 했다가 하나님께 죽임을 당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하네요. 편지는 지금 관점에선 ‘그게 죽을 일인가?’ 생각되지만, 당시의 관점에선 “생명과 상관없이 정자를 죽였다는 점”에서 나름의 합리를 가졌던 행위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자위행위도 금지했다고 하네요. ‘정자에서 생명이 나오는 게 아니라 난자와 정자가 만나 생명이 된다’는 과학적 관점이 일반화한 지금은 질외사정이나 자위행위가 죄가 되지 않습니다. 합리의 기준이 바뀐 거지요.

그러니 동성애에 대한 관점 역시 ‘현대화’해야 한다는 게 목사님의 설명입니다. 편지는 “신약성서의 경우에는 여성과 여성의 관계를 언급하며 정죄하고 있지만, 전후 문맥을 보면 ‘상업적인 성행위’에 대한 정죄가 지배적”이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성서에는 동성애 외에도 정죄하는 죄들이 수도 없이 많다”고 하네요. 편지를 보면, 특히 이혼 문제에 대해 예수는 “간음한 연고없이 이혼하는 것은 죄”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교회 안에서 예수의 말씀대로 ‘혼외정사 문제’가 없이도 “이혼한 장로 집사들이 많고, 미국의 경우 목사들도 많다”고 하네요. 그러니 성서를 근거로 ‘동성애를 정죄해야 한다’는 전제라면, 심지어 예수의 말씀까지 명확하게 기록으로 남아있는 이혼은 더 가열차게 정죄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이혼에 대한 죄는 묻지 않습니다. 목사님은 ‘이혼은 죄를 묻지 않으면서 동성애는 죄를 묻자’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 “내게도 가능성이 있는 죄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내게는 가능성이 없는 죄에 대해서 목소리는 높인다? 이건 정의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참고로, 예수는 ‘동성애 문제에 대해 일절 언급이 없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마지막으로 “성서 전반을 통해 흐르는 하나님의 성품은 자비”라며 “심지어 가나안 사람들을 전멸시키는 여호수아서 같은 성서에서도 자비와 공존의 신학을 중간중간 내비치고 있다”고 말합니다. 복음의 기본은 “로마서 5장8절에 기록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선포”라고 합니다. 애초 “‘완벽’과는 거리가 먼 인간을 하나님이 받아주시고 사랑하셨다는 것이 성서의 기본 메시지”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동성애가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 따질 것도 없이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주는 것이 기독교인이 취할 자세라고 믿는다”며 “하나님도 아닌 존재들이 하나님처럼 심판자의 자세로 다른 사람이나 다른 종교를 비난하는 일부 기독교도들의 주제넘은 행동에 대해 목사로서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저와 이메일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목사님은 미국 교회에서 있었던 일화도 하나 소개했습니다. 백인 목사 중에 동성애자가 있었는데, 이 목사가 청소년 수련회를 인도했다고 합니다. 그때 알게 된 학생 한 명이 나중에 이 목사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전화 통화를 하며 울더랍니다. “목사님 무지 존경했는데 게이라니, 그동안 제가 가지고 있던 게이에 대한 생각에 큰 혼란이 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말이죠. 목사님은 그러면서 “편견을 깨는데 직효약은 만남과 대화”라면서 “직접 경험해본 사람은 생각이 달라지거나, 최소한 심각한 고민을 한다. 자꾸 만나 대화해야 한다”며 두 번째 이메일을 맺었습니다. 누가 저 학생에게 저런 고통을 안겨준 걸까요.

성서도 결국 시대와 체제의 산물입니다. 이혼에 대해 죄를 묻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인식됐던 시대가 있었고, 가부장적 체제가 무너지면 사회 전반이 무너진다고 생각했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정자 그 자체로 생명이기에 질외사정이나 자위행위도 죄가 되던 시대 역시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류는 구시대의 유물이 된 ‘합리’를 유지하기 위해 폭력까지 동원하던 체제에 맞서, 변화한 인식을 제안하고 논쟁하고 투쟁하면서 새로운 경계와 합리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합리를 보편화하는 과정의 산물이고, 그런 과정을 통해 이뤄낸 인류의 소중한 진보입니다. 인권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왜 유독 동성애 등 성소수자에 대해서만 새로운 합리의 기준을 적용하려 하지 않는 걸까요.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볼 일입니다.

참, 오늘 12월 10일은 세계인권선언일입니다.

이재훈 기자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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