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세웅 신부(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가 지난 2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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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웅 신부의 수식어는 ‘투쟁하는 신부’다. 그는 1974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만들고, 박종철 물고문 사망 사건을 폭로하는 등 1970~1980년대 독재와 불의에 맞서며 시대와 함께했다. 2012년 주임신부직에서 은퇴한 뒤에도 거리에서, 언론을 통해서 목소리 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함 신부는 2021년 10월부터 2022년 9월까지 52차례 <한겨레> 온라인판에 연재한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기도>(라의눈 출판)를 얼마 전에 책으로 엮어 냈다. 480쪽짜리 두툼한 책엔 해방부터 5·16 군사반란, 부마항쟁, 박근혜 탄핵 등 격동의 현대사가 담겨 있다. 책에는 시대의 아픔과 함께한 그가 역사의 현장에서 깨닫고 찾은 의미들을 신학적으로 풀어 놓았다. 52편의 글 서두엔 성서 구절을 인용하고, 다음엔 역사적 사건을 풀고, 기도문으로 마무리하며 각 주제어를 붓글씨로 썼다. 함 신부는 “은퇴 뒤 강론지를 엮고 싶다는 계획이 있었는데, 또 다른 형태로 내 삶을 종합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편안하고 좋았어요. ‘아멘’이 많이 들어가지만, 책은 서점의 역사 코너에 놓였어요. 하지만 사실 저는 투사가 아니고 기도하는 사제입니다” 하고 웃으며 말했다.
지난 2일 함 신부가 이사장으로 있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에서 그를 만났다.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있는 기념사업회 사무실은 그가 나고 자란 생가에 자리를 잡았다.
―기념사업회 사무실을 신부님 생가에 차렸습니다?
“2007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집이 비었어요. 마침 안중근평화연구원 법인을 설립할 때 설립 요건에 일정 정도의 자산이 있어야 한다기에 내놨습니다. 나는 형제도, 자식도 없으니까요.(웃음) 안중근 의사는 천주교 신자인 점에서도 마음이 갔지만, 안 의사의 평화 사상 등을 알고 난 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프랑스 주교가 독립운동을 못 하게 하고, 조선 사람이 공부를 하면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안 의사의 학교 건립 제안도 거부했거든요. 그런데도 유언장에 자신을 반대했던 뮈텔 주교에게 조선에 가톨릭 신자가 많아지고 (가톨릭이) 평화의 요람이 되면 좋겠다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해요.”
― 2012년 주임신부직을 은퇴하고 10년이 넘었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나요?
“매주 토요일엔 붓글씨를 배우고 있어요. 지난 12월엔 책 출간과 연말 모임 등으로 조금 바빴고요. 문재인 전 대통령이 나흘 동안 책을 다 읽고 ‘역사를 통해 과거를 배우고 오늘을 해석하며 내일을 바라보는 데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추천사를 써주셨어요. 그동안 문 전 대통령 비판을 좀 했는데 이제는 그것도 못 하겠네요.(웃음)”
‘정의’라는 단어를 붓글씨로 쓰고 있는 함세웅 신부.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붓글씨는 언제 시작했나요?
“김홍일 전 국회의원 아내에게서 문방사우를 선물 받은 뒤에 시작했어요. 전부터 붓글씨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망설이다가 배운 지 5년쯤 됐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성격이 급해 글씨를 예쁘게 쓰지 못했던 터라 예쁜 붓글씨를 쓰고 싶었어요. 스승인 이동천 서예가에게 ‘예쁜 글씨’를 쓰고 싶다고 했더니 ‘신부님, 예쁜 글씨는 필요 없어요. 송장에 화장한들 예쁩니까? 살아 있는 글씨를 쓰세요’ 하더라고요. 목숨을 걸고 쓰라면서요.”
―그래서 목숨 걸고 붓글씨를 썼나요?
“붓글씨 쓰는 데 목숨까지 걸 일인가 싶었죠.(웃음) 그런데 그게 성서의 종말론적 가치와 맞닿아 있더라고요. 마지막인 것처럼 쓰라는 거지. 그 깨달음을 얻고 온 힘을 다해서 썼어요. ‘힘껏 눌러쓰라’고 해서 하도 눌러썼더니 한지가 찢어지고, 어느 때는 붓 머리가 부러지기도 했어요. 한지가 찢어지는 경우는 드물다고 하더라고요.”
―처음 쓴 글자는 무엇이었나요?
“제 이름 중 ‘세’(世) 자였어요. 이 글자를 예서체로 쓰면 십자가 세개가 돼서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양옆 십자가에 죄수 두명도 함께 매달렸잖아요. 그게 떠오르면서 십자가가 제 이름에 있는 게, 제 삶의 과정인가 싶었어요. 붓글씨를 배우던 초반엔 성서의 주제어들을 썼어요. 이렇게 쓴 구절들은 2020년에 있었던 윤형중 신부님 추모 전시회 ‘암흑 속의 횃불’전에 걸렸습니다.”
―역사와 기도를 접목한 책이라는 점에서 독특해요. 어떻게 기획하게 된 건가요?
“추모 전시회에 오신 한 수녀님께서 제 글씨에서 ‘울부짖음’이 느껴진다고 하셨어요. 그러곤 ‘성서 말씀도 좋지만 시대의 증언을 해주면 좋겠다. 신부님이 살아온 삶을 표현하기 위해 시대적인 구호,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학생들의 열정과 구호를 쓰고 해설하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 수녀님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나고 지학순 주교님의 양심선언을 타이핑했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분이셨어요. 수녀님의 말씀에 한번 해보자 싶었죠. 제가 살아본 시대가 아니었던 때 있었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공부를 해서 썼고, 1950년대 들어서는 중학생 때 보고 들은 이야기를 상기하며 썼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 선거를 고발한 박재표 순경 얘기는 당시에 들었을 때 감동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붓글씨 쓰기의 대상이 성서에서 역사로 옮겨 간 셈이네요. 특히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나요?
“사실 성서와 역사는 별개가 아니고 성서 자체가 역사예요. 그러니까 성서의 역사를 넓힌 거라고 볼 수 있죠. 기록한 사건 중 가장 아팠던 기억은 인혁당 피해자들의 고문 소식을 들었을 때예요. 전기고문·물고문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밤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요즘 인권의학연구소에서 고문 피해자들 모임을 하고 있어요. 이분들이 고문당한 이야기를 들으면 아직도 저릿저릿해요. 고문을 당하는 사람도 비인간이 되고, 고문을 자행하는 사람도 비인간이 되는 거잖아요. 국가폭력은 인간, 역사, 신앙의 이름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동안 한국 현대사의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신부님께 역사를 기록하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구호가 ‘기억투쟁’이었습니다. 기억은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를 묶어내는 인간적 능력이자 초월적 능력이에요. 이걸 성서적으로 해석하면 악과 불의와 싸우는 영적 투쟁이고요. 제가 기록하는 건 ‘해야 하면 한다’는 책무입니다. 예전에 북한에 갔을 때 오후 5시쯤 어린이 방송에서 어르신들이 아이들에게 일제 침략 때 맞서서 싸운 이야기 등 옛날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민족 교육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일 잔재 청산 교육이 살아 있는 교육이 되는 거죠. 역사 교육을 할 때 우리 선조들이 어떤 길을 살아왔는지 이야기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를 ‘역사전쟁’이라고 합니다.”
―최근 고시를 마친 2022 개정교육과정에 ‘5·18 민주화운동’이 빠져 논란이 있었습니다. 논란이 되자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교과용 도서 편찬준거에 ‘5·18 민주화운동’과 함께 주요 역사적 사건을 반영하여 교과서에 기술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어요.
“그때그때 임기응변식으로 넘기려고 하는 거예요. 역사는 임기응변이 아니라 사상의 물줄기예요. 물줄기는 흔들면 안 됩니다. 해방 이후 독립 정신을 가진 정부가 세워진 게 아니라, 친일파들이 정치 현장에 나왔습니다. 이게 우리 민족사의 원죄예요.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등 친일파 뿌리가 반공으로 이어졌고, 지금 여당인 국민의힘 뿌리도 친일, 유신, 반공 독재 잔재의 후예입니다. 반공이 민족정신으로 왜곡된 거죠.”
―부천서 성고문 사건 때 가해 경찰 문귀동을 불기소한 것 등을 비롯해 검찰에 대한 비판이 책에 많이 실렸습니다. 윤석열 정부에서 대통령실·국무총리실·법무부·국가정보원 등 검사 출신들이 포진하며 ‘검찰 공화국’이라는 말까지 나오는데요.
“이승만 시대 때 검찰은 경찰의 하수인, 박정희 때는 중앙정보부의 하수인, 전두환 때는 군인의 하수인이었어요. 그러다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물결이 일면서 검찰이 검찰권을 확보했죠. 오늘날 검찰권을 찾아준 게 민주 학생, 민주 시민이에요. 그런데 시민이 찾아준 검찰권을 검찰 독재로 남용하고 있어요. 역사와 민주 시민 앞에 대죄악입니다.”
―북한에선 무인기를 보내고, 윤석열 대통령은 압도적인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는 등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번 대통령 신년사에서도 대북 메시지가 빠졌고요.
“올해가 정전협정 70주년입니다. 평화협정을 해야 할 때인데 안타깝죠. 한국전쟁에서 겪은 아픔을 우리가 잊고 살고 있어요. 지금은 6자 회담이 다 중단됐지만, 남북 당사자 회담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아적으로 ‘반공’만 외치고 있어요. 미숙한 데서 비롯된 일이죠.”
―신부님이 현장에 있었던 1970~1980년대가 권력자에 대한 투쟁의 시대였다면, 현재는 세대·성별·지역 갈등이 더 커지고, 혐오 발언이 거세졌어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는 개인주의와 관련이 높은 신자유주의의 영향 아래 있게 됐습니다. 또 한국뿐 아니라 온 세계가 신자유주의를 경제 원리로 삼으면서 빈부격차 확대 등 병폐를 낳았고, 현재 청년 세대는 전인적 교육을 기초로 받지 못하면서 이기심과 개인주의가 팽배해졌어요. 그 부분이 안타깝고 마음이 아픕니다.”
―종교인으로서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에 부담은 없었나요?
“인간의 모든 언행은 그 자체가 정치적이에요. 성서에서 정치를 빼면 남는 게 없어요. 성서는 하느님의 정치, 교육, 역사입니다.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정치적입니다. ‘정교분리’라는 말이 틀린 말이에요. ‘정교구분’이라고 해야 합니다.”
―‘분리’와 ‘구분’은 어떻게 다른가요?
“분리는 영역을 나누는 것이고, 구분은 역할을 달리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제가 종교인이더라도, 투표에 임하는 정치적 행위를 합니다. 제가 대통령이 된다든지 장관이 되는 건 직접적인 정치지만, 종교인도 넓은 의미에서 민주 시민으로서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그 부분을 오해하고 있어요.”
―지난달 31일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이 선종하셨습니다.
“제가 신학생이던 1965년까지 그분은 젊은 신학도로서 촉망받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1968년 파리 혁명 후에 그는 수구 신학자로 변신합니다. 그 후 주교, 추기경으로, 바티칸 교리성 장관으로 20여년 봉직했는데, 이 기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이 퇴색됐다는 평을 받습니다.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로 대표되는 해방신학과 종교다원주의 등 진취적 신학 사조에 대해 무섭게 제재했습니다. 이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보필하면서 결과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멈추게 했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교황직을 사퇴한 점은 그분 생애의 가장 큰 업적으로 칭송받습니다. 교회의 쇄신과 그분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함께 기도합니다.”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기도>를 꼭 읽었으면 하는 독자층이 있나요?
“청년들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청년은 시대와 미래를 바꿔야 하는 사람들이에요. 독립운동, 4·19, 민주화운동 모두 청년·학생이 주체였습니다. 청년이 깨어나야 민족에게 길이 생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역사를 알고 역사의 길을 바로잡으면 좋겠어요. 또 우리가 순국선열들에게 역사적 빚을 지고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출판기념회는 오는 14일 오후 2시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23층 컨벤션홀에서 열린다. 이후 오후 3시30분부터 교보문고에서 저자 사인회를 한다. “1987년 1월14일은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사망한 날입니다. 일부러 날을 이렇게 잡은 건 아닌데 ‘섭리’인 것 같아요. 많은 분들, 특히 청년들이 많이 오면 더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장수경 기자
flying710@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