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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권·복지

“캄캄한 사법시대 ‘뜨거운 가슴으로’ 인권변호 길 열었죠”

등록 2022-03-20 18:13수정 2022-03-22 18:33

【가신이의 발자취】 고 홍성우 변호사를 기리며

지난 3월 16일 별세한 홍성우(오른쪽부터) 변호사가 고 황인철 변호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고 김수환 추기경에게 담배를 빌리고 있고, 고 송건호 <한겨레> 초대사장도 함께한 모습이다. 1970년대 후반 서울 명동성당에서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한인섭 교수 제공
지난 3월 16일 별세한 홍성우(오른쪽부터) 변호사가 고 황인철 변호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고 김수환 추기경에게 담배를 빌리고 있고, 고 송건호 <한겨레> 초대사장도 함께한 모습이다. 1970년대 후반 서울 명동성당에서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한인섭 교수 제공
유신·5공 시절 ‘인권변호의 중심’
첫 시국 변호는 민청학련 사건
13번 접견 시도 김근태 고문 확인
노동자·여성 인권 옹호에도 헌신
양심수 소신 지켜주는 것 중시

옳다면 차마 거절 못 하는 성품

로스쿨에서 <법조윤리>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가끔 변호사윤리강령을 낭독하게 한다. 그 첫 번째가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사회정의 실현을 사명으로 한다”이다. 이때 자주 홍성우 변호사님을 떠올리며 설명을 보태곤 한다. 굴곡 많은 우리 현대사에서도 유신·5공 체제 하에서 법조인들은 “회한과 오욕에 찬” 시절을 보내야 했고, 법원은 “권력의 시녀,” 검찰은 “정권의 주구“로 지탄받았다. 이러한 암흑기일수록 본래 사명에 충실한 변호사가 더욱 필요한 법이다. 그 소임을 기꺼이 짊어졌던 일군의 변호사들을 일컬어 ‘인권변호사’라 했다. 그 중심에 홍성우 변호사가 있다.

1974년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4호를 공포하여 학생과 민주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잡아들여,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을 만들었다. 악명높은 정보·고문 기관에 끌려간 이들에겐 가족 면회도 엄금되었고, 서슬푸른 기세에 모두 몸을 사렸다. 그런데 뜻밖에 몇몇 변호사들이 나섰다. 매일이 지옥이었던 학생들에게 변호사들과의 만남은 “저승에서 부모님을 뵙는 것처럼 반가왔다”(장영달)고 한다. 재판은 비상군법회의에서 속전속결로 진행되었고, 적법절차는 철저히 유린되었다. 변호사들은 이런 식의 재판이면 “사법살인”이나 마찬가지라고 맞섰지만, 항의하던 변호사마저 법정에서 끌어냈다. 홍성우 변호사에겐 민청학련 사건이 시국사건 변론의 첫 사건이었다. 그런 사건에 발 디딘 대가는 혹독했다. 사건 수임도 끊기도, 사무실 전화벨도 울리지 않았다. 이쯤 되면 물러설 법하지만, 그는 달랐다. 오히려 시국사범 인권변론의 한길로 매진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엄청난 고난과 위해가 닥쳐올 게 뻔할지라도, 진정 가야 할 길, 옳은 길이라면 차마 거절하지 못하는 마음”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김정남 회고). 이런 혹독한 시련을 혼자 감당하기란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그는 다른 변호사들을 끌어들였다. 이렇게 황인철, 홍성우, 이돈명, 조준희 등 변호사들은 ‘인권변호사’가 되었다. 돈 안 되는 사건, 유죄를 면하기 어려운 사건들일수록 이들에게 몰렸다.

이들을 일러 “패소전문 변호사”라든가, 이들에게 가면 이길 사건도 진다는 비아냥도 따랐다. 지금 자세히 자료 검토를 해보니 정반대다. 법정에 “칼이 섰던” 무시무시한 시절에, 죽을 뻔한 사람을 여럿 살려냈고, 고문과 조작을 성공적으로 폭로해낸 건 다반사다. 홍 변호사 소신은 이랬다. “현실의 법정에서 그들의 주장은 무시되고 외면당했지만, 우리 변호인들은 확신했다. 훗날 역사의 법정에서, 아니 그때까지 가지 않더라도 양심이 살아있는 이성의 법정에서는 절대로 질 이유가 없다고!” 그러한 믿음으로 인권변호사들은 고난 속에서도 서로 격려하면서, 변호사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누구에게든지, 어디든지 달려갔던 것이다.

1970년대 고 홍성우 변호사. 한인섭 교수 제공
1970년대 고 홍성우 변호사. 한인섭 교수 제공
변호사는 피고인 입장에 서서 감춰진 진실을 밝혀내고, 적법절차의 실현을 요구하고, 때로는 국가권력과 싸우는 전사이기도 하다. 첫째로 요구되는 자질은 성실성이다. 1975년 한국일보 기자들이 노조를 결성했다고 해고하고 탄압한 사건에서 해직기자들은 이렇게 회고한다. “홍성우 변호사는 처음부터 무료변론을 맡아주었다. 기자들에겐 더할 수 없는 원군이었다. 홍 변호사는 노조의 7년 소송을 모두 맡아주었는데, 처음과 중간과 끝이 한결같았다.”(이창숙 회고)

변호사는 열정과 집념이 있어야 한다. 1985년 민청련 김근태 의장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이라는 “인간도살장”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있겠구나 짐작하고 홍 변호사는 어떻게든 접견하고자 애썼다. “김근태가 검찰에 넘어왔다는 소식들 듣고 댓바람에 서울구치소로 갔어요. 가니까 없다고 해요. 할 수 없이 도로 돌아왔어요. 다음날 접견하러 가고 또 허탕 치고, 그다음날 또 가고. 헤아려보니, 모두 12번 허탕을 쳤습니다.” 겨우 13번 만에 첫 접견을 해낸 짧은 순간을 활용해서 홍 변호사는 고문피해 사실을 듣고 고문흔적이 남아있는 발뒤꿈치를 볼 수 있었다. 이로부터 조작공안사건은 고문규탄사건으로 확 바뀌게 되었다.

1980년대 초엔 간첩조작사건이 횡행했다. 그중에서도 ‘송씨일가 간첩단 사건’은 최악질이었다. 그는 회고한다. “이 사건을 접하고 공소장 보고 하니까, 한마디로 이 사람 다 죽게 생겼더라고. 몇 달 동안 이 사건에 미쳐 다녔습니다. 어떻게든지 이 사건 좀 관심을 가져달라 하고 변호사들을 모으고 재야 쪽에 알렸습니다.” 이렇게 결성된 홍 변호사팀은 ‘간첩단 사건’의 고문과 조작을 폭로하고, 법정투쟁을 가열차게 전개했다. 그리하여 송씨일가 사건은 최종 판결까지 무려 7심급을 거쳤다. 대법원에서 파기를 두 번이나 해 ‘핑퐁재판’이라 불렸다. 끝내 유죄판결로 종결되었지만, 애초 날조조작의 상당 부분은 무력화되었다. 그때 변호사들의 재판투쟁과 변론기록은 재심무죄판결을 내리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후일담이다.

홍 변호사는 피고인, 양심수들의 소신을 지켜주는 것을 자신의 일차적 책무로 여겼다. “변호사로서, 정치범들 양심범들 변호하면서, 나의 최소한의 역할은 그 사람의 소신을 지켜주는 일이라 생각했어요. 고문받고 힘들어도 그 소신을 떳떳이 지키는 게 양심범들이 나갈 길이라고 생각해요. 소신을 굽히고 억지 전향시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긴 인생을 놓고 보면 그것참 잘못하는 겁니다. 사람의 생각과 사상 자체는 변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자유의지로 생각을 바꾸어야지 권력이나 압력 때문에 소신을 꺾으면 사람이 망가져요. 인간적 자존심과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변호사 일이지요.”

홍 변호사는 노동자와 여성의 인권 옹호에도 앞장섰다. 1982년 원풍모방 여성노동자들이 노조를 조직했다고 모멸과 핍박을 받았을 때 그는 자기 일처럼 분노했다. 그가 쓴 항소이유서 초고를 보니, 꽉꽉 눌러쓴 필압의 형적이 지금도 여전했다. “오로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가 그 누구에나 있다는 것을 그들은 그들의 희생을 통하여 외치고 증거하고 있다. 오늘날 이 나라의 그늘진 산업사회의 희생양이 된 이들의 수난은, 가난하되 정직하고 착하게 사는 모든 사람의 삶 속에서 길이 기억될 것이다.” 이렇듯 홍 변호사는 “누구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옹호하면서, 그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록화하고자 힘썼다.

2009년 고 홍성우 변호사가 필자와 대담을 마친 뒤 활짝 웃고 있다. 한인섭 교수 제공
2009년 고 홍성우 변호사가 필자와 대담을 마친 뒤 활짝 웃고 있다. 한인섭 교수 제공
홍 변호사가 쓴 변론서를 보면 공들여 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렇게 써봐야 재판에 제대로 반영되지도 않는데 왜 공연한 헛수고를..., 이런 의문이 들 법하지만, 그의 자세는 이랬다. “읽어라도 보라는 거지요. 나 혼자라도 진실을 밝혀놓지 않으면 나 자신을 용납할 수 없다는 심정이었죠. 또 그렇게 해서라도 피고인들에게 용기와 위안을 주고 싶었어요.” 절망의 시절일수록 오히려 자신의 기준을 엄정히 세워야 함을 일깨워 준다.

한 명의 인권변호사 활약은 다른 변호사들을 인권변론의 대열에 끌어들이게 되고, 작은 팀이 점점 커다란 조직으로 발전했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면 조영래, 이상수 등 변호사들이 가세해 연대변론의 방식을 개척하면서 ‘정법회’를 결성하고, 나아가 1988년에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을 결성한다. 홍 변호사 등은 이제 연장의 지도자로서 모임의 대표 역할을 맡게 된다. 이후 민변을 주축으로 하여 민주화, 인권, 소수자 보호 등 공익인권변론의 도도한 흐름으로 발전하는 시발점이 된 것이다.

변호사들에게는 기록이 쌓이고 쌓여 어느 단계에 이르면 버리는 게 일상이다. 그러나 홍 변호사는 “그 기록들을 차마 버릴 수 없었다”고 한다. “암흑기의 민주화투쟁사를 정리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혹 세월이 좋아지면 패소했던 재판기록을 찾아서 재심재판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한가닥 기대. 이 때문에 이 자료들을 버린다면 뭔가 죄짓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홍 변호사는 그 기록을 대학에 모두 내어주셨고, 나는 이를 받아 학생들과 함께 정리하고 자료집도 냈다. 그 기록들은 인권변론 및 민주화운동의 사초로서, 쓰여지지 못한 우리 현대사의 상당 부분을 채울 수 있는 가치있는 것들이다.

필자가 홍 변호사와 한 본격적인 인터뷰는 <인권변론 한 시대>(2011년)라는 책으로 간행되었다. 대담을 마치며 홍 변호사께 물었다. “돌이켜보면 어떠신가요?” 자필로 쓴 자료를 뒤적여 음미하면서 홍 변호사는 답했다. “그때는 혼신의 힘으로 변론했어요. 참으로 뜨거운 가슴으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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