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가 11월15일 서울 종로구 재단 사무실에서 고 박완서 작가와 가수 션 등 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을 도운 기부자들의 사진을 가리키며 이야기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2016년 4월 중증장애어린이 재활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으론 국내에서 첫 개원한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어린이 재활병원)이 코로나로 인해 심각한 재정난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애초 수익을 내려던 게 아니니까 어느 정도 적자는 불가피했지만, 지금 상태로는 내년에 정상적인 운영이 가능할지 불투명하다고 한다. 개원 직후에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어린이 재활병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첨단 시설과 함께, 환하게 웃는 장애어린이와 가족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장애인 시설에 몹시 배타적인 우리 사회 분위기에서 서울 중심부에 어린이 재활전문병원이 들어선 것만 해도 쉽지 않은 일인데, 뜻하지 않게 위기에 처한 건 안타까운 일이다. 병원 설립에 중심 역할을 한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를 만나, 재정의 어려움 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장애인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관해 얘기를 들었다.
― 재정이 이렇게 악화된 건 코로나가 직격탄이었습니까?
“코로나 영향이 큽니다. 우선 환자가 격감했습니다. 어린이 입원환자들은 어른과 달리 꼭 보호자가 필요한데, 코로나로 외부 접촉이 차단되니까 보호자들이 집을 오가면서 다른 아이를 돌볼 수가 없는 거에요. 또 어린이들이 아무래도 면역력이 떨어지니까, 입원실에서 함께 생활하니까, 감염될까 부모들이 걱정을 하구요. 입원환자뿐 아니라 외래환자도 많이 줄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에 의료수입 손실이 크게 늘었고, 올해도 지난해 못지않게 손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우리 병원은 적자였습니다. 돈 벌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착한 적자’는 당연한 것이죠. 연 평균 27억~30억원 정도 적자가 났는데, 그 정도는 많은 기부자들의 도움으로 재단에서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적자 규모가 지난해 54억원이 되면서, 기부금이나 서울시 지원금으로 메꾸지 못하는 순수 적자가 27억~28억원 정도 난 거죠. 지난해엔 적자분을 병원에서 감가상각을 위해 쌓아둔 돈으로 메꿨는데, 올해는 그것도 쉽지 않은 형편입니다. 지금 상태로는 내년엔 직원들의 급여 지급도 어려운 상황이에요. 병원 건립에 큰 돈을 낸 넥슨이 올해 운영비를 상당액 지원해 주기로 했는데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중앙정부가 중증장애어린이의 의료수가를 현실화해서 제도적으로 지원을 해줬으면 합니다.”
― 푸르메병원의 건강보험 수가가 너무 낮다는 뜻인가요? 왜 의료수가가 낮은 겁니까?
“거기엔 사정이 있습니다. 지금 병원 부지가 원래 SH공사 소유의 사회복지시설 용지였습니다. 마포구에서 부지를 매입해 제공하고, 우리(푸르메재단)가 모금으로 병원건물을 지은 겁니다. 사회복지시설이다 보니 처음에 요양병원으로 등록을 했습니다. 요양병원 의료수가는 낮게 책정이 됩니다. 그런데 푸르메병원은 투명하게 운영하고 공익적 성격도 뚜렷하니까 (수가 산정에서) 가산점을 주는 게 맞다고 봅니다. 서울대병원이나 삼성서울병원 같은 대형 의료기관도 어린이 재활치료엔 소극적입니다. 수지가 맞지 않으니까요. 국내 유일의 어린이재활 전문병원을 요양병원이란 이유로 가산점 산정에서 계속 제외하는 건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2016년 개원한 서울 마포구 상암동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 전경. 지하 3층 지상 7층 규모로 재활의학과·소아청소년과 등 4개 진료과와 작업치료·언어치료 등이 가능한 재활치료센터를 갖춰, 하루 500명의 장애어린이를 치료할 수 있다. 푸르메재단 제공
백경학 이사는 언론사 기자 출신이다. 기독교방송과 한겨레신문,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일했다. 그러다 1996년 7월에 서울시 공무원이던 아내와 함께 독일 뮌헨대학으로 연수를 갔다. 2년간 공부하고 돌아오기 직전, 자동차로 영국을 일주하는 여행을 하다가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아내는 100일간 중환자실에서 세 번의 수술을 받고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한쪽 다리를 잃었다. 백 이사가 장애어린이 재활사업에 모든 걸 바치게된 결정적 계기다.
― 푸르메병원 건립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겁니까?
“아내가 영국에서 수술을 받고 독일로 옮겨 1년반 정도 재활 치료를 받고 귀국했습니다. 그때 독일 의사가 한 말이, 계속 재활치료를 받지 않으면 근육과 뼈가 굳어버리니 한국 돌아가서도 꼭 재활을 하라는 거였어요. 그런데 한국에 와보니, 재활병원 상황이 너무 열악하더라구요. 신촌 세브란스재활병원이 전문병원으론 거의 유일했는데 그나마 성인 대상이고 어린이 재활병원은 전무한 상태였지요. 그래서 작게라도 어린이 재활 전문병원을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병원을 어떻게 만들까 고민하다 비영리재단을 만들어서 여기서 운영하는 병원을 지으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2005년 각계 인사들과 함께 푸르메재단을 설립했습니다. 아내가 보험회사로부터 받은 보상금(20억6천만원)의 절반인 10억6천만원을 재단 설립기금으로 삼았지요. 그런데 병원을 만드는 건 또다른 문제더군요. 접근성을 생각하면 서울시내에 지어야 하는데, 시설 건립비용은 모금으로 충당한다 치더라도 도저히 부지를 구할 수가 없는 거에요. 장애인 재활병원에 누구도 부지를 내놓으려 하질 않았어요.”
― 상암동 푸르메병원의 부지는 어떻게 구했습니까? 거긴 주민들의 반대가 없었나요?
“반대 많았죠. 2011년에 상암동 대로변에 SH공사가 갖고있던 1천평 규모의 땅이 나왔는데, 세금까지 하면 부지 매입에 1백억원 정도가 필요한 거에요. 또 이게 사회복지시설 용지로 잡혀 있어 1차 매입권한이 마포구에 있었어요. 그래서 박홍섭 당시 마포구청장님을 찾아갔죠. 어린이 재활병원 취지를 설명하고, 마포구에서 땅을 매입해 병원 부지로 제공해줄 수 없겠냐고 요청했죠. 그랬더니 박 구청장님이 땅 매입을 마포구에서 할테니, 병원 건립과 운영을 푸르메재단이 책임지고 해달라고 하시더라군요. 그 좋은 땅을 왜 구청 예산으로 매입해 장애인 시설을 들이느냐고 구 의회와 주민들의 반대가 엄청 심했죠. 공청회장에선 제가 주민들에 둘러쌓여 봉변을 당할 뻔한 일도 있었구요. 박 구청장님께서 푸르메재단을 믿고 힘을 실어주셨고, 재단에서도 430억원의 후원금을 모아 2016년에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이 문을 열게된 겁니다.”
― 개인 모금으로는 한계가 있을 거 같고, 기업들이 장애어린이 문제에 좀더 관심을 갖고 후원을 하게할 방법은 없을까요?
“그래서 아이티(IT) 쪽 기업 몇곳에 제안을 한 게 있습니다. 국내 뿐 아니라 북한 장애어린이들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자고 말입니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장애어린이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요즘 들어 태도가 바뀌고 있습니다. 평양의대에서 어린이재활병원을 개설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거든요. 그렇다면 남북한 전체의 장애어린이 치료를 지원하는 기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일이 남북 화해와 교류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기업에 그런 제안을 한 겁니다. 기금이 조성되고 남북관계가 풀리면, 북한에 처음에는 보조기나 휠체어 같은 걸 지원하고, 그 다음엔 의료진이 들어가서 교육과 치료사 양성을 도와주고, 나중엔 병원까지 지을 수가 있습니다. 미국의 빌 게이츠는 재산의 절반을 사회공헌에 쓰잖아요. 얼마 전 김범수 카카오 의장이 재산의 절반을 사회를 위해 쓰겠다고 했듯이, 남북 장애어린이를 위해 기금을 내놓겠다는 분이 곧 나오시리라 기대합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푸르메재단은 어린이재활병원에 이어 두번째 주력사업으로, 올해 4월 경기도 여주에 장애인 일터인 푸르메소셜팜(social-farm)을 설립했다. 독지가가 기증한 땅에 방울토마토와 표고버섯을 재배하는 최첨단 온실을 지었고, 직원 기숙사와 방문객들을 위한 카페도 갖출 예정이다. 현재 이곳에선 38명의 발달장애 청년들이 일을 하며 월 110만원의 급여를 받고 있다. 장애를 가진 청년과 그 가족들에겐 ‘꿈의 직장’이라고 한다.
― 푸르메소셜팜은 어떤 목표를 갖고 조성한 겁니까?
“푸르메병원에서 처음 치료받은 어린이들이 지금 20살 안팎의 청년이 됐습니다. 치료는 잘 받았지만 성인이 되니 할 일이 없는 거에요, 24시간 집에만 머물다 보니 부모와 갈등도 심하구요. 이들이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다, 자립해서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농장을 만들자고 한 겁니다. 때마침 여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발달장애 아들을 키우는 이상훈∙장춘순 부부께서 3800평의 부지를 기부해주셨어요. 여기에 방울토마토를 키우는 온실과 표고버섯 농장을 지어서 지난 여름부터 수확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옆에 식당과 강당, 갤러리 카페도 짓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농사체험과 봉사도 하면서 ‘장애인이 이런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있구나’ 감동을 받았으면 합니다. 장애인 문제의 지속가능한 해법은 결국 일자리입니다. 지금 38명이 일하고 있는데 내년까지 50명으로 늘릴 계획입니다. 일하는 청년들과 가족들은 대만족이죠.”
― 농장의 총 건립비가 어느 정도 됩니까?
“총 130억원이 투입될 예정입니다. 처음엔 80억원 정도를 예상했는데, 지열과 태양광 등을 이용한 자연친화적인 농장을 짓기로 했고 직원들을 위한 식당과 강당 등 부대시설을 첨가하다 보니 건립비가 늘어났습니다. 앞으로 다른 지역에 농장을 짓게 되면 설립비용을 훨씬 줄일 수 있을 겁니다.”
― 그 정도 투자에 그 정도 인원이 일하면, 효율성이 좀 떨어지는 건 아닙니까?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 1인당 2억원 이상의 시설비를 투자하는 게 비효율적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교통비 정도의 싼 급여를 주고 많은 사람을 채용하기보다는, 쾌적한 환경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혼자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초기비용이 많이 들겠지만, 자립이 가능한 평생 직장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결코 비효율적인 일이 아닙니다. 아이티(IT) 기술을 접목해 효율적으로 생산하면서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배우고 좋아하는 취미활동도 할 수 있다면, 장애인 직장의 새로운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농장이 전국에 생기면 많은 장애인들이 주위 도움 없이도 자립할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그런 구조와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올해 4월 경기도 여주에 문을 연 장애인 일터 ’푸르메소셜팜’에서 두 직원이 방울토마토를 재배하고 있다. 푸르메재단 제공
― 앞으로 이런 방식의 장애인 농장을 전국으로 확대할 생각입니까?
“성남이나 수원, 고양 등 서울 근교에 두번째 도시형 소셜팜을 만드는 것이 1차 목표입니다. 꼭 푸르메재단이 아니더라도, 지방자치단체와 기업들이 이런 운동에 많이 동참해줬으면 합니다. 지방자치단체 소유의 부지나 폐교에 농장을 지으면 됩니다. 얼마 전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님을 만났는데, 경기도에만 특수학급에 2만7천명의 학생이 있다면서 제 구상에 적극 공감하시더라구요. 문제는 우리 사회의 인식입니다. 서울시내에 폐교가 하나 나와서 구청에 장애청년의 일터를 만들자고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포기했죠. 주민들이 장애인시설을 강하게 반대하니까 서울시교육청이 지레 겁을 먹고 주저하더군요.
연세대에 총장님을 한번 뵙자고 요청해 놨습니다. 연세대가 지난해 장애인을 고용하지 않아 낸 부담금이 55억원이에요. 앞으로 매년 얼마를 더 내야할지 모릅니다. 장애인 일터를 잘 만들면 이런 큰 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그런데 대기업과 대학은 그렇게 안해요, 복잡하게 장애인 일터를 세우느니 부담금을 내는 게 오히려 편하다는 생각이죠. 대한항공이 올해 낸 장애인부담금이 77억원입니다. 인천공항공사는 영종도에 적지 않은 부지를 갖고 있습니다. 사회공헌 차원에서 공항 부근에 장애청년이 일할 수 있는 농장을 하나 짓자, 그래서 생산품을 곧바로 외국에 수출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처음에는 긍정적이었는데 나중에 곤란하다고 하더라구요, 농장은 공항 관련 시설이 아니라 어렵다고요. 머리를 맞대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텐데, 아쉬웠습니다. 푸르메소셜팜은 이런 인식을 넘어서자는 시도입니다. 일자리를 만들지 않으면 장애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정부와 지자체, 그리고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인식을 바꾸는 게 중요합니다.”
―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가 상암동 푸르메병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면서요? 그때 문 후보가 어떤 얘기를 하셨나요?
“대선 석달쯤 전인 2017년 2월에 문재인 당시 민주당 후보가 상암동 푸르메병원에 오셨습니다. 병원을 둘러보시고 굉장히 감동을 받으신 거 같았아요. ‘시민들이 기금을 모아 이런 병원을 지은 데 책임감을 느낀다. 정치인으로서 미안하다. 시민들도 고맙고, 푸르메재단도 고맙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전국에 권역별로 어린이 재활병원을 짓겠다고 공약하셨어요.”
― 그 약속은 지켜졌습니까?
“지금 대전에 어린이 재활병원을 짓고 있고, 호남과 영남에도 지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임기중에 병원 한 곳이라도 완공이 돼서 문 대통령이 가시면 좋을텐데, 그러기는 어려운 거 같습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 내년 봄엔 또다시 대통령선거가 실시됩니다. 장애어린이 문제에 관해 여야 후보들에게 어떤 얘기를 하고 싶으세요?
“어린이가, 특히 첫째 아이가 중증 장애를 가지면 집안이 흔들립니다. 통계를 보면 (장애아 가정의) 절반 정도가 이혼을 합니다. 일가족 자살 등 비극적인 사건을 보면, 가족 중에 장애를 가진 분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장애어린이를 잘 치료하는 건 그들을 사회 구성원으로 만든다는 의미도 있지만, 가정의 붕괴를 막아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든다는 의미도 큽니다. 조기에 치료할수록 나중에 장애인을 보살피는 데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요즘은 다문화 가정에서 장애어린이 문제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이 분들은 정보가 부족하니까 장애아를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장애아를 어렸을 때 잘 치료하면 평생 그 사람에게 들어갈 사회적 비용을 1/3 이하로 줄일 수 있습니다. 개인의 행복 뿐 아니라 사회 전체로 보더라도 장애아 치료와 재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대통령후보들이 이런 점에 더 관심을 기울였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