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러시아 우수리스크에 제막된 최재형기념비와 흉상 옆에 선 최발란틴. 사진 <연합뉴스>
러시아 연해주 항일 독립운동의 대부인 최재형(1860∼1920년) 선생의 손자 최 발렌틴(83) 한국독립유공자후손협회 회장이 14일(현지시간) 별세했다.
최 회장은 지난달 18일 독일에 사는 큰딸을 방문하던중 스키장에 갔다가 사고를 당해 경추가 골절돼 독일 현지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뒤 지난 7일 모스크바 시립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았으나 의식불명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재형 선생 3남의 아들인 최 발렌틴은 엔지니어로 활동하며 최재형 선생을 세상에 알렸을 뿐 아니라 ‘사진으로 본 러시아 항일 독립운동’ 전 3권을 출간하며 고려인들의 항일 독립운동 역사를 재조명하는 활동에도 앞서왔다.
올해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총독을 척살하기 전 권총을 제공하며 의거를 막후에서 지원한 최재형 선생이 순국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로, 최재형의 대표적인 자손이 사고사를 당해 안타까움을 던져주고 있다.
지난해 8월12일 러시아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고택에서 열린 최재형 기념비 제막식에서 고려인들과 함께 선 최발렌틴(흉상 오른쪽). 사진 조현기자
최재형 선생은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와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9살 때 굶주림을 벗어나고자 이주에 나선 조부와 부친을 따라 시베리아 노우키에프스크로(연추)로 이주했다. 10대 시절 가난을 이기지 못해 가출한 그는 항구에서 노숙하다 쓰러졌으나 러시아 선장 부부에게 구조돼 6년간 러시아 상선을 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연추로 돌아온 뒤 러시아군 통역과 군납업으로 큰 재산을 모으고, 지역의 도헌(군수)가 되었다. 그는 이런 부와 지위를 활용해 연해주 일대 한인촌에 30여개의 학교를 세우고, 우수한 학생들을 대도시로 유학을 보낸 뒤 이들이 다시 돌아와 학교에서 동포 아이들을 가르치도록 후원해 동포들간에 ‘페치카(벽난로) 최’로 존경받았다.
최재형은 1908년 독립운동 조직인 동의회를 조직한 데 이어 의병부대 대한의군에 무기와 숙식을 제공했고, 이듬해에는 동포신문인 <대동공보>를 인수해 사장을 맡았다. 특히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안중근이 결의를 다지고자 단지동맹을 한 곳도 최재형의 집이었고, <대동공보>의 기자증을 발급받아 신분을 보장받기도 했다.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때 그는 초대 재무총장이 되었다. 1920년 일제에 의해 순국한 최재형 선생의 주검과 묘지는 지금껏 찾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8월에는 최재형선생 순국 100돌을 앞두고 최재형기념비가 최선생의 고택이 있던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최재형순국100주년추모위원회 공동대표인 소강석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 안민석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 문영숙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등으로 주도로 제막됐다.
최발렌틴은 제막식에서 “할아버지가 우수리스크의 감옥에서 일제에 의해 총살을 당한 뒤 자손들은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 사마라로 강제이주 당했고, 브루주아로 탄압을 받아 할아버지의 이름조자 꺼내지 못하고 살았다. 고려인들은 할아버지를 가슴 속에 기억해 내가 ‘최재형의 손자’라고 하면 감격으로 말을 잇지 못하곤 했다”며 “잊혀진 할아버지를 조국에서 되살려줘 감개가 무량하다”고 말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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