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성 <불교평론> 주간
서울 강남구 신사동 <불교평론> 세미나실에 모셔진 조오현 스님 영정에 향을 사르고 있는 홍사성 주간
‘이밥홍차’ 모임 중인 문형렬 소설가와 홍사성 주간, 이상문 전펜클럽회장(왼쪽부터)
시로, 같은 은사 스님으로 인연 스승 열반 뒤 신흥사 주지 잇는 자리
조오현 스님 추천된 뒤 환속 선언 “스승 기대 부응하고 대중 눈높이만큼
중노릇을 해낼 자신이 없어서” 일반회사 일하다 다시 불교계 돌아와
‘불교신문’ 기자, ‘불교방송’ 설립 참여 조오현 스님 부추겨 ‘불교평론’ 창간
시문학잡지 ‘유심’도 만들어 “큰스님 큰 품은 만년쯤 된 고목나무” 필화 때도 책임지면서 간섭은 안해 환속한 홍 주간은 반도체회사에서 일하다 1982년 <불교신문> 기자로 ‘불교계’로 돌아왔다. 승복을 입고 조계종단의 학비 지원을 받는 ‘종비생’으로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한 만큼 불교계에 입은 은혜를 4년만 갚자는 생각이었는데, 결국 <불교방송> 설립에 참여하는 등 불교계에 다시 뼈를 묻고 말았다. 그는 불교계에서 일을 하면서 전형적인 일 중독자였다고 한다. 부하들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예전의 그 모습을 잘 아는 지인들이 요즘 그를 보면 “속한이 부처가 됐다”는 농담을 던진다고 한다. 그는 “다 큰스님의 큰 품 덕”이라고 고백한다. 그가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사실상 <불교티브이> 고위직에서 잘려 설악산에 내려갔을 때였다. 조오현 스님은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이라고 했다. 선어록에 나오는 이 말은 ‘오늘 죽어도 괜찮고, 내일까지 살면 더 좋고’라는 뜻이다. 조오현 스님은 “그대로 다녔으면 술 취해 도로를 건너다 차에 치여 죽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다행 아니냐”고 했다. 홍 주간이 훗날 낸 첫 시집 <내년에 사는 법>도 이 ‘선어’를 딴 것이다. 홍 주간은 1999년 불교평론지가 필요하다며 조오현 스님에게 손을 내밀었다. 몇 차례의 청에 조오현 스님은 “꼭 필요하다면 절을 팔아서라도 해야지”라며 지원했다. 조오현 스님은 경제적 지원을 하면서도 편집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불교평론>의 비판적 글이 ‘필화’로 번졌을 때도 조오현 스님은 책임은 자신이 졌지만 일체 간섭하는 법이 없었다. <유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불교 얘기를 따로 쓸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가 <유심>에서 뛰놀게 했다. 스님들이 “불교 포교도 아닌 데다 무슨 돈을 그렇게 쓰느냐”고 군소리를 하면 “불교계가 세상에 입은 은혜를 어떻게 다 갚을 수 있겠느냐. 이렇게 갚는 것이다”고 했다. 홍 주간은 “큰스님의 그릇은 범인들이 헤아리기 어려웠다”며 일화를 전했다. “너희는 저들보다 뭐가 잘났노” “설악산에서 선방 결제나 해제 때면 유랑승들이 몰려들었다. 종단에선 승려 체면을 손상시킨다고 객비를 못 주게 했다. 그러나 큰스님은 이들을 후하게 대접했다. 이를 제지하는 문도에겐 ‘너희는 저들보다 뭐가 잘났노. 저 사람들은 객비 몇 푼 얻으면 그만이지만 너희들은 그 돈 아껴 어디다 쓰노?’라고 오히려 호통을 쳤다." 또 한번은 사무실 보조원을 채용했는데 엉뚱한 실수 투성이어서 홍 주간이 그만두게 하려 했을 때였다. 조오현 스님은 “너처럼 잘난 놈은 어디 가서든 먹고 사는데, 저 녀석을 여기서 쫓겨나면 어디로 가겠느냐”고 했다. 홍 주간이 “도저히 일을 시킬 수 없다”고 하자 “청소라도 시켜라”며 그 청년의 월급은 따로 챙겨주는 것이었다. ‘설악산 스님’이란 시에서 ‘속은 진작 다 죽고 껍데기만 겨우 살아 있는, 한 만년쯤 된 고목나무’로 조오현 스님을 표현한 홍 주간이 마침내 눈시울을 적셨다. “늘 외롭게 홀로 지내던 큰스님이 가끔 전화를 했다. 벗들과 술을 마시던 중이어서 ‘여기 지방이다’고 둘러대곤 했는데, 큰스님은 다 알면서도 늘 ‘그러냐’고 했다. 이제 누구에게 그런 거짓말을 할 것인가.”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