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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교

비워낸 가난함만이 ‘사람’을 지킨다

등록 2016-09-14 10:30수정 2016-09-14 10:30

그가 세월호 유가족들의 단식장에 나타난 날은 지난 8월23일이었다. ‘나타났다’기보다는 ‘스며들었다’는 표현이 낫겠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단식을 알릴 만한 표지도 없이 천막 끝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날은 그가 사제로 산 지 꼭 25년이 되는 날이었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부부로 만나 부대끼며 살아온 것에 비하자면 저 좋아 혼자 산 25년이 대단한 일은 아닐 테지만 신자들은 그날 떡을 찌고 국수를 말아 잔칫상을 차려주곤 한다. 신부는 과분한 밥상을 받으며 지난날에 감사하고 앞으로도 꼬박 신부로 살 수 있길 기도한다. 그날만큼은 축하받고 배부르고 행복해도 괜찮은 날이다. 그런 날 그는 밥을 끊었다.

그와 유가족들이 다시 밥술을 뜨기 시작한 날은 9월7일이다. 작고 마른 체구의 그는 그새 더 가벼워졌다. 유가족들을 안아주기에는, 가혹한 현실의 담장을 넘기에는 초라하고 볼품없는 어깨다. 실제로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운명은 여전히 불투명하고 이 욕망의 세상은 속절없이 출렁일 뿐이다. 그의 배고픔이 보태거나 남긴 것은 없다. 굳이 있다면 지켜보던 이들이 느꼈을,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불편함, 그리하여 동년배 신부들의 유쾌한 잔칫상을 망친 것뿐이다.

살집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깡마른 그는, 더 이상 가진 것 없는 유가족들은, 대체 무엇을 더 비워내겠다고 밥을 굶은 것일까? 잔인한 세상을 이기기엔, 두터운 어둠에 맞서기엔 한없이 딱하고 나약하지 않은가. 하지만, 가진 힘이라곤 실제로 제 살을 태우는 것밖에 없어서기도 했겠지만 그의 볼품없는 어깨만이, 저 부모들의 완전한 무력함만이 마침내 물에 잠긴 아이들을 건져 올릴 억센 팔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죄 없고 힘없던 생명을 수습할 손길이라면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것은 어쩌면 “거짓과 탐욕과 미움으로 오염된 몸”으로 아이에게 세례를 주며 “영원히 꽃이기를 바라는 바람마저 부끄러워”하는 어느 신부의 마음이자(호인수/유아 세례를 주며), 십계를 받고자 산에 오른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으로 나아가며 벗어야만 했던 신발(탈출기 3:5)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고백하건대 밥을 굶고 있는 그와 유가족을 지켜보며 나는 그것으로 여태 완고하던 현실이 무너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믿는 세상의 순리와 시선의 깊이를 짐작하게 되었을 따름이다. 1972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극화한 프랑코 체피렐리 감독도 그들과 비슷한 세상을 믿었던 이라 여겨진다. 붉은 추기경모와 화려한 예복들로 둘러싸인 교황이 높고 가파른 대리석 계단을 홀로 내려와 누더기 차림의 프란치스코를 만나는 화면은 압도적이다. 가장 철저한 가난을 자처한 청년의 발에 가장 큰 부와 권력을 지닌 늙은 교황이 입을 맞춘다. 실제로 그의 수도회는 교회 역사상 가장 막강한 권세를 누렸던 인노켄티우스 3세와 호노리우스 3세에게 각각 인준되었다. 가난한 삶을 약속했던 자신의 첫날을 잠시 기억해낸 교황은 이내 빨려 들어가듯 시종과 고관들의 무리로 사라진다. 아쉽지만 충분히 웅변적인 장면이다. 속을 비우며 그들이 전하려 한 것 역시 같다. 그것은 이 가난함만이 무력한 생명들을 추스를 마땅한 손이고, 까마득한 탐욕 앞에 끝내 ‘사람’을 지킬 거란 사실이다.

장동훈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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