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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교

그날 저녁 그 길을 걸었다

등록 2015-09-29 20:41수정 2015-11-04 10:57

쉼과 깸
입담 좋은 이의 이야기는 한번도 못 가본 곳의 산세와 능선, 냇가의 빛깔, 심지어 들판의 냄새까지도 맡게 한다. 무슨 말인지 절반은 순전히 감으로 어림잡던 유학 초년 시절, 난청에 가까운 나조차도 기꺼이 듣고 싶은 강의를 하던 교수가 그랬다. 베드로 성당이 있는 바티칸 지구의 내력에 대한 강의는 지금도 생생하다. 파시즘 정권과 교회가 정교협약을 맺으며(1929년 라테란 조약) 그 기념으로 건설한 테베레 강변부터 바티칸 광장에 이르는 말끔한 대리석으로 마감된 일직선 도로, ‘화해의 길’. 그날도 그는 ‘신작로’가 들어서기 전, 생선전의 비릿함과 건물 사이 젖은 빨래들, 채소상자 가득한 골목들을 한참 지나다 준비 없이 육박하듯 펼쳐지는 너른 광장과 화려한 성전을 잊을 수 없다던 아버지의 어릴 적 경험을 꼭 자신의 이야기처럼 잘도 묘사했다. 그러면서 곧게 뻗은 지금의 밋밋한 대로는 멋스러움도 없지만 골목들을 한참 헤쳐 나온 후 갑자기 만나게 되는 시각적 상징성마저 잃었다고 아쉬워했다. 그날 저녁 그 길을 걸었다. 대로는 물론 일부러 성당 옆 골목들도 가로질러봤다. 신작로가 들어서며 묻혀버린 것들은 무엇일까. 교수가 말한 생선내도 빨래도 채소전도 사라졌겠지만 골목들 사이에 폭 파묻혀 사람들의 구구한 애환을 자신의 내력으로 삼았던 옛 성당도 함께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번듯하지만 사람과는 멀어진, 내력 없는 압도감만 남았다.

9월은 교회가 전통적으로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달이다. 크고 작은 행사가 치러지고 순교자 찬가가 미사를 가득 채운다. 무릇 진정한 기념이라면 절멸의 위기를 뚫고 보란 듯이 돌아온 장군의 개선이 아닐 텐데 모두 화려하고 말끔하기만 하다. 행사뿐인가. 대규모 개발에 가까운 성지 조성은 어제오늘 일도 아니다. 순교자들이 감내한 잔인한 고문 같은 극적인 죽음에만 집중하는 시선도 유감이다. 그들보다 더 잔인하고 무의미하며 비참한 죽음들은 이 세상에 얼마든지 많다. 간난신고 끝에 오늘 우리 앞에 정작 생환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마지막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살았던 내력이다.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죽기를 원함이 아니라 죽기를 각오하게 한 삶, 저버린 세상이 아니라 살기를 원했던 세상이다. 말끔한 대리석과 푹신한 잔디 위에 담겨질 수 없는 것들이다.

바티쿠스, 점쟁이가 모여 살던 옛 로마의 지명이 바티칸의 어원이란다. 점쟁이가 누구인가. 사람들 곁에서 언제든 애환을 들어주는 이다. 가난한 동네에 만신 깃발이 유독 많은 까닭이겠다. 영욕의 시간 동안 점쟁이들이 있던 자리를 틀고 앉아 사람들의 사연을 내내 들어주던 성당, 그 때 묻은 내력만큼 생생한 교회가 어디 있을까.

장동훈(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장동훈(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내력을 잊은 오늘만큼 오늘을 살지 못하는 기념 역시 민망하다. 허세다. 죽은 용기를 칭송하면서도 정작 죽음을 불사하고라도 그들이 살고자 했던 세상을 헤아리지 않는 기억이라면 어찌 온전하다 하겠는가. 지난해 여름 광화문을 가득 메운 인파들이 알아채야 했을 역설의 대목이다. 단식 30일, 쌍용차 해고 노동자가 제 살과 피를 덜어내며 저토록 같이 살기를 바라는 내일, 그날을 오늘 우리가 어떻게든 상상해야 하는 이유다.

장동훈(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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