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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교

왜 용서해야 하는가…어둠을 어둠으로 몰아낼 수 없다

등록 2015-09-29 20:40수정 2015-11-04 10:56

1. ‘용서’ 전도사인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아놀드 목사. 사진 브루더호프 공동체 제공
1. ‘용서’ 전도사인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아놀드 목사. 사진 브루더호프 공동체 제공
명절 때 오랜만에 가족들과 해후해 행복한 이들도 있었겠지만, 오래 묵은 상처가 덧난 이들도 있을 것이다. 상처와 분노는 삶을 갉아먹는 독이다. 그래서 ‘용서’는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타파해야 할 화두다.

더구나 한국전쟁과 급격한 사회 변화 과정에서 갈등과 부익부 빈익빈, 편견 등으로 분노지수가 높은 우리나라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순환 고리를 어떻게 끊느냐는 사회와 국가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미국과 영국에서 이미 시작돼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는 한 용서 프로그램이 우리에게도 빛을 보여주고 있다. ‘폭력의 고리 끊기’(BTC·Breaking the Cycle)다.

이 프로젝트는 국제적인 기독교공동체인 브루더호프의 지도자인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목사가 1999년 미국에서 발생한 콜럼바인 총기사고 이후 시작한 것이다. 전신마비 사고를 당한 뉴욕 경찰관 스티븐 맥도널드 등과 함께 왕따와 폭력, 총기사고 등에 멍든 중·고등학교를 방문해 자신의 경험을 전해주고 얘기를 나눠 놀라운 호응을 얻고 있다. 미국에선 벌써 학교 588곳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2008년부터 시작된 영국에서도 지난해에만 80개 학교가 함께하는 등 참여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

아놀드가 이 프로그램의 주요 강사들의 얘기를 포함시켜 펴낸 <왜 용서해야 하는가>(원마루 옮김, 포이에마 펴냄·사진)라는 책이 한글판으로 나왔다.

이 책엔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용서한 이들이 나온다. 찰스 윌리엄스는 알코올 중독으로 자신의 유년 시절을 악몽으로 만든 어머니를 용서했다. 그는 “어린 시절 상처가 나머지 인생마저 송두리째 망치도록 더 둘 수는 없었다”고 용서의 이유를 설명했다. 또 순찰중인 경찰관 스티븐 맥도널드는 흑인 소년에게 총을 맞아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되었으나 소년을 용서했다. 그는 “척추에 박힌 총알보다 가슴속에 자라는 복수심이 더 끔찍했다”고 고백했다. 또 세계적인 뮤지션인 장폴 삼푸투는 1994년 90일 사이에 100만명이 죽은 르완다 대학살 때 부모와 세 형제와 누이를 동시에 잃고 고통을 이기지 못해 알코올과 마약에 손을 대며 감옥을 드나들었다. 그는 오랜 분노 끝에 “늘 끌어안고 있는 두려움과 분노가 나를 죽이는 진짜 적이다”라는 것을 깨닫고 용서를 택했다.

2. 총격을 받아 평생 불구의 몸이 된 장애인이 ‘왜 범인을 용서해야 했는지’를 말하는 ‘폭력의 고리 끊기’ 강연 모습. 사진 브루더호프 공동체 제공
2. 총격을 받아 평생 불구의 몸이 된 장애인이 ‘왜 범인을 용서해야 했는지’를 말하는 ‘폭력의 고리 끊기’ 강연 모습. 사진 브루더호프 공동체 제공
이런 사례를 전하며 증오와 두려움의 감옥으로부터 탈출을 돕는 <왜 용서해야 하는가>의 저자 아놀드 목사를 서면 인터뷰했다.

브루더호프공동체 이끄는 아놀드 목사
‘왜 용서해야 하는가’ 저자 서면 인터뷰

미 콜럼바인고교 총기사고 이후
‘폭력의 고리 끊기’ 프로젝트 시작
용서의 사랑으로 고통 극복한 사례 강연
미국과 영국 학교에서 큰 호응 불러
‘용서’ 독서모임 선정 땐 책 무료 제공

-가정에서 부모에게 폭력이나 상처를 입은 경우 평생 가는 경우가 많다.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부모님의 행동으로 받은 상처만큼 회복하기 힘든 일도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상처를 입고 고통스러워할 때 내릴 수 있는 선택은 아주 아파하고 기분이 상해서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정의’를 이루려고 하거나, 아니면 용서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먼저 분노를 품고 다니는 것이 잘못된 일임을 알아야 한다. 내가 적을 용서할 때 적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게 아니다. 사실은 나 자신에게 좋은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언급된 것들은 대부분이 극단적인 경우다. 현대인들은 경쟁 속에 내몰리다 보니,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거나 상사 및 동료와 불화로 인해 고통받는 경우가 많다. 이때 어떻게 하는 게 좋은가?

“우리 중에 살인이나 강간 같은 엄청난 일로 용서를 해야 하는 상황을 겪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하지만 우리 모두 매일 배우자나 자녀, 친구나 동료를 용서해야 하는 상황을 겪는다. 아마 하루에 수십번도 더 그런 일을 겪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매일 용서하는 일이 극단적 상황의 용서보다 덜 어려울 수는 있어도, 절대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똑같이 중요하다. 아마도 매일 용서를 실천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을 향해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다뤄야 한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다시는 보지 않을 낯선 사람을 용서하기는 쉬워도,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훨씬 더 힘들다. 내 아버지 하인리히 아놀드는 ‘숱하게 배신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분노와 불신에 잠겨 사는 것보다 용서하는 게 훨씬 낫다’고 말하곤 했다.”

-자식이 살인을 당한다면, 신앙인들도 분노를 주체하기 어려워 심신을 상하게 될 수 있다. 우선 먼저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가?

“그런 상실의 고통을 억제하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치유를 진정 희망한다면 고통을 표현하고, 그런 어려운 감정을 다뤄야 한다. 아픔과 두려운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상실감이 크지만) 용서를 선택해서 평화를 찾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어야 한다. (용서를 찾아가는 일은) 힘겨운 여행이지만,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여행이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평화를 향한 깊은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다.”

3. <왜 용서해야 하는가> 책을 읽으며 폭력과 용서에 대해 대화하는 학생들. 사진 브루더호프 공동체 제공
3. <왜 용서해야 하는가> 책을 읽으며 폭력과 용서에 대해 대화하는 학생들. 사진 브루더호프 공동체 제공
-뜻하지 않게 자식이나 가족을 잃게 될 경우, “왜 내게 이런 일이?”라며 살인자에게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분노가 치밀기 마련이다. 이때 어떻게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가?

“분노할 대상이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도 누군가를 향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도 치유와 회복에 대한 희망을 걸고 누군가에게 분노를 털어놔야 한다. 결국에는 ‘받아들임’이 하나님을 용서할 수 있게 한다. 이걸 경험하지 않으면 우리는 운명에 반항하게 되고, 억지로 지게 된 것같이 느껴지는 삶의 십자가를 매번 뿌리치게 될 뿐이다. 하지만 받아들일 때 우리의 어려움을 통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바라보게 되고, 그 고통을 함께 짊어질 힘을 얻게 된다.”

-학교에서도 왕따와 폭력이 심각하다. 가해자는 끊임없이 다른 학생들을 찾아 폭력을 행사하기도 해서, 용서만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럴 때 가해 학생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단순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치유를 주는 일이란 보기 드물다. 용서는 그리스도의 명령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삶과 관계 속에서 깨어진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중요한 열쇠다. 증오를 증오로 갚으면 증오만 더 증식시킬 뿐이며, 별이 보이지 않는 밤하늘에 짙은 어둠만을 더할 뿐이다. 어둠으로 어둠을 몰아낼 수 없다. 오직 빛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미움이 미움을 몰아낼 수는 없다. 오직 사랑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미움은 미움을, 폭력은 폭력을, 그리고 가혹함은 가혹함을 낳는다. 마치 구덩이 밑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랑만이 오직 적을 친구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미움에 미움으로 맞서서는 절대 적을 없애지 못한다. 적의를 없앰으로써 적을 없앨 수 있다.”

‘용서’ 독서 모임 프로젝트 아놀드 목사는 삼삼오오 모여서 토론해볼 것을 제안한다. 증오와 분노, 고통스런 감정과 함께 우리 안의 폭력과 편견, 그리고 용서와 치유 사례를 함께 모여 나누라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와 출판사는 독서모임 등에서 <왜 용서해야 하는가> 책을 읽고, 이런 아픔과 경험을 나누며 치유를 경험하고 싶은 한국인들에게 책을 선물해주기로 했다. 교도소나 기존의 독서모임도 신청할 수 있다.

인터넷 휴심정(well.hani.co.kr) 게시판에 자신의 상처와 아픔, 고통, 또는 용서하지 못했거나 용서한 사례를 올리고, 이 책으로 독서모임을 할 계획을 알려 선정되면, 한 모임에 최대 15권까지 책을 무료로 보내준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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