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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종교

러시아의 사도세자

등록 2015-09-29 20:36수정 2015-11-04 10:56

빛깔 있는 이야기
1718년 2월3일. 러시아의 고위 귀족과 성직자들이 크레믈(크렘린)에 소집되었다. 황태자의 반역사건 처리와 새 후계자를 정하기 위해서였다. 28살 알렉세이 황태자는 46살의 표트르 대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황태자비를 냉대했고 군에서 탈주했으며 외국으로 도피했다. 황태자는 폐적되고 황위는 이복동생에게 돌아갔다. 알렉세이는 복음서와 십자가에 입을 맞추고 표트르가 죽은 뒤에도 동생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했다. 비극의 시작에 불과했다.

표트르는 잔혹한 생존의 위협 가운데 황위에 올랐다. 외가가 멸문지화를 당했고 훗날 자기도 그렇게 복수했다. 군인이자 기술자로 반생을 전장에서 보냈다. 스웨덴을 격파했고 폴란드를 영유했고 독일과 프랑스를 찍어 눌렀다. 반면 황태자는 아버지를 닮지 않아 유약했다. 함대와 포병의 기술보단 신학과 예배를 좋아했고 전쟁보단 이상적 평화를 추구했다. 어머니와 성직자들, 권력과 서구화 정책에서 밀려난 구귀족들이 그를 부추겼다. 아버지는 자주 아들을 질책했다. 총신 멘시코프 대공을 감시자로 세우기도 했다. 소용없었다. 아들은 점점 아버지가 두려워 피했다. 부친이 정한 시험날 모면을 위해 권총으로 제 손을 쏘기까지 했다. 고해신부에게 ‘아버지가 죽기를 기도드린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주님께서도 황태자를 용서하실 겁니다. 지금 이 나라에선 당신뿐 아니라 모두가 황제가 빨리 죽기를 바라고 있으니까요.’ 마침내 비밀리에 탈출을 감행했다. 빈을 거쳐 나폴리까지 도망했지만 결국 러시아로 끌려왔다. 로마노프 황실의 국제적 망신은 말할 수도 없었다.

표트르는 황태자를 포기했다. 그러나 새 후계자는 아직 두살배기였다. 조용히 살려 해도 근친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황제는 황태자의 측근들을 반역죄로 체포한다. 100여명이 고문 끝에 자백하고 사형에 처해졌다. 황태자의 차례가 왔다. 그는 40대의 채찍을 맞고 국부와 생부 살해 및 반역음모 혐의를 전부 인정했다. 사형이었다. 국왕의 서명만이 남았다. 표트르는 비로소 한 아버지로 돌아온다. 성직자들에게 부친을 반역하고 죽이려 한 아들에 관한 성서의 처벌을 물었다. 신부들은 레위기와 신명기를 인용했다. ‘죽이는 것도 가하나 아버지의 관용으로 용서할 수도 있다.’ 모호한 답변을 했다. 불행이라 해야 할지 다행이라 해야 할지, 황태자는 부친이 판결을 내리기 직전 죽음을 맞았다. 반역자가 아닌 황태자로 기록된 것이다.

천정근 목사(안양 자유인교회)
천정근 목사(안양 자유인교회)
일찍이 왕가의 옥좌들은 피로 얼룩졌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고 한다. 문제는 왕가가 아니라 우리들의 현실이다. 세조는 조카를, 인조와 영조는 자식을 죽였지만 그것이 광란 말고 무엇인가. 세월호든 청년실업이든 비정규직 세대간 밥그릇 논쟁이든 국민을 자근자근 미치게 만들어가는 배경에는 끝내 잔혹한 권력의 탐욕이 있을 뿐이다. 영화 <사도>에서 화해와 해답의 힌트를 본다. ‘사람 나고 예법 났지 예법 나고 사람 난 게 아니라’고. 자식을 죽여 권력을 지키는 드라마는 지나간 역사도, 남 얘기도 아니다. 뒤늦게 ‘생각하고 슬퍼한’(思悼)들 무슨 소용인가. 일설에 따르면 황태자는 도끼로 무참히 참수됐다고도 하지만, 나는 그걸 믿고 싶지는 않다.

천정근(목사·안양 자유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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