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의 한국어 인사 트위트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을 하루 앞둔 13일 자신의 트위터에 한국어로 “한국으로의 여정을 시작하며, 한국과 아시아 전역을 위한 저의 기도에 동참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라는 글을 게재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4일부터 18일까지 한국을 방문한다. 프란치스코 교황 트위터
교황의 리더십
아르헨티나 관구장 시절
극보수주의자로 통해
대주교땐 경청·토론 즐겨
아르헨티나 관구장 시절
극보수주의자로 통해
대주교땐 경청·토론 즐겨
교황궁을 거부하고 동료들과 더불어 게스트하우스에서 거주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때 ‘극보수’로 통했다면 믿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랬다. 그도 한때는 꽉 막혀 극보수주의자로 여겨진 인물이다.
베르골리오(교황의 본명)는 불과 36살에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장을 맡아 가톨릭 용어로 ‘장상’(長上)이 됐다. 가톨릭은 구성원들이 장상에 대한 순명 서약을 할 만큼 수도회에서 장상의 권한은 막강하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장상을 맡기엔 너무 젊은 나이에 무거운 책임을 맡은 것이다. 더구나 그의 앞엔 학살과 고문, 실종이 난무한 독재정권의 ‘더러운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 아르헨티나 출신 체 게바라(1928~67)의 죽음과 베트남전쟁의 영향으로 낡은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욕구가 서유럽에서 남미로 불어왔다. 이런 변혁운동에 대학생들뿐 아니라 사제와 수도자들도 참여해 많은 이들이 수도자복을 벗고 현실에 뛰어들었다. 그로 인해 아르헨티나 예수회도 한 세대가 비어버렸다. 그래서 한 세대를 건너뛰어 젊은 베르골리오가 수도회를 이끌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수회 신부이자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 교수이며, 잡지 <치빌타 카톨리카>의 편집장으로서 프란치스교 교황과 최초의 공식 대담집 <교황 프란치스코-나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를 낸 안토니오 스파다로 신부는 “베르골리오 신부는 관구장 임기 초기에 거칠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어서 당시엔 초보수주의자로 통했다”고 썼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하는 교황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인터뷰에서 “나의 권위주의적이고 신속한 방식은 내게 심각한 문제를 초래해 극단적 보수라는 비난을 받았고, 그 이후 커다른 내적 위기의 시기를 지냈다”고 고백했다. 그는 “사람들은 권위주의에 곧 피로해지게 마련”이라며 자신의 당시 통치에 대해 “미친 짓”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베르골리오는 변해갔다.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주교 시절에 15일마다 여섯명의 보좌주교와 회의를 했고 사제평의회와 여러 차례 함께했다. 그들은 질문을 했고 토론이 벌어졌다. 베르골리오가 너무 많은 의견을 경청하자 사람들은 “자문을 그만 청하고 그냥 결정하라”고 할 정도가 됐다.
“하지만 저는 자문을 구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믿어요. 추기경회의와 주교대의원회의(시노드) 같은 자리요. 그러나 그것들을 형식 면에서 덜 경직되게 할 필요가 있지요. 형식적인 자문이 아니라 실제적인 자문을 저는 원하거든요.”
한때 극보수주의자로 통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나중엔 공산주의자로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우파였던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또 다른 인터뷰에서는 “공산주의자였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건 소통의 스타일 문제지 이념적으로 우파나 공산주의에 경도된 적이 없다는 뜻으로 보인다.
스파다로 신부도 그를 이념적이고 추상적인 의미에서 좌파나 우파로 볼 수 없다고 본다. 베르골리오가 체험과 행동을 중시했지 이데올로기주의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변화해온 인물이다. 그는 “주님은 나의 실수와 결점을 통해서도 통치에 대한 이런 교육을 허락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한국을 방문하는 14일 첫날 박근혜 대통령을 만난다. 권위주의자에서 민주주의자로 바뀐 그와의 만남을 통해 박 대통령도 변화할 수 있을까.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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