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명륜동 문묘와 성균관은 조선의 왕들이 궁궐보다 중시한 유교의 정신적 산실이었다. 조선이 사라진 지 1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공자를 비롯한 성현을 모신 문묘와 성균관이 옛 모습을 지켜온 데는 숨은 지킴이 ‘수복’(守僕)의 공이 작지 않다. 수복은 ‘지키는 종’이란 뜻이다. 수복은 문묘 청소뿐 아니라 분향, 석전 등 각종 제례를 준비하고, 유생들 식사를 챙기고, 숙직·치안까지 담당해 문묘와 성균관의 모든 것을 가장 잘 아는 지킴이다. 그런데 대대로 성균관 내에서 살아온 지킴이가 문화재청으로부터 이달 말까지 퇴거할 것을 요청받아 쫓겨날 처지가 됐다.
현재 성균관 수복은 셋째아들이자 막내인 이욱(56·오른쪽)씨다. 그는 할아버지 이완산(1902~1969·52년간 재직), 아버지 이정우(1932~2012·47년간 재직)에 이어 10년째 가업을 잇고 있다. 한국 유교를 이끄는 성균관에서 수복이라는 직책을 공식적으로 맡고 있는 이는 이욱씨지만, 실은 문묘에서 행사가 열릴 때마다 제사를 준비하며 안살림을 도맡아온 이는 이 수복의 어머니 김인겸(87·왼쪽)씨다.
지난 3일 성균관에서 두 모자를 만나 사연을 들어봤다.
성균관 지킴이 김인겸씨가 젊은 시절 문묘 제사에 쓸 술을 빚고 있다. 성균관 제공
어머니 김씨는 이 수복의 부친 이정우씨와 1959년 1월 결혼한 이래 수복이었던 시아버지를 모시며 석전 대제와 제사를 준비했다. 행사를 위해 시아버지와 남편이 마당의 풀을 뽑고 쓸고, 수백개 사당 문을 열고, 제기를 닦고, 돗자리를 까는 동안 김씨는 떡을 만들고, 술을 빚고, 소고기 30㎏(50근)을 다져 육포로 만드는 등 고된 노동을 감내했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수복으로 있을 때만 해도 유림의 세가 만만치 않았고, 독립운동가이자 성균관대 설립자인 심산 김창숙 선생이 성균관을 지키고 있어서 백범 김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나 대통령, 대선 후보들의 문묘 고유례 때마다 옆에서 의전을 돕는 일을 했다. 일제강점기 때 당한 고문으로 하반신을 쓰지 못한 김창숙 선생을 전차역에서 성균관까지 업어서 출퇴근시킨 것도 시아버지와 남편이었다. 더구나 남편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상이용사여서 무거운 물건을 나르는 중노동까지 김씨의 몫이었다.
해방 이후 성균관에서 유도교도원 개강 당시 찍은 기념사진. 앞줄에 정인보 선생(맨 왼쪽)과 백범 김구(가운데), 심산 김창숙 선생 등이 자리하고 있다. 성균관 제공
그런데도 퇴락해가던 성균관으로부터 받는 수고비는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쳤다. 남편의 국가유공자 연금까지 합해도 식구들을 건사하기 어려워 김씨는 지금의 유림회관 부속동 자리에 있던 판잣집에서 구멍가게를 하며 세 아들을 키웠다. 그러면서도 성균관을 찾는 손님을 대접하고, 동재와 서재에 기숙하던 학생들의 식사 준비와 뒷정리까지 하느라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이 수복을 비롯해 자식들이 장성해 성균관 밖으로 분가한 뒤에도 김씨는 홀로 남아 성균관 선비들이 밥을 먹던 진사식당의 방 한칸에서 살아왔다. 2008년 남대문 화재 이후 문화재청의 방재 방침이 강화된 뒤로는 유림회관 부속 건물에 딸린 26㎡(8평)짜리 구석 방으로 옮겨 지내왔다. 유림회관 부속 건물은 문화재가 아니다. 그런데 문화재청이 그 자리에 있던 성균관의 담장을 복원하고자 이 건물을 헐기로 하면서 최근 김씨에게 퇴거 명령을 내린 것이다.
성균관은 이승만 정부 때 정부 소유가 됐지만, 수복직에 대한 정부의 배려는 전무했다. 성균관 쪽이 수복인 이씨에게 월 143만원을 주는 게 전부다. 어머니 김씨에게는 그나마도 없다. 김씨는 그렇게 성균관 행사 때마다 조상 대대로 해온 제물 준비를 ‘무임금’으로 묵묵히 해왔다. 석전대제 같은 큰 행사 때 70만원이 든 봉투를 받은 것도 최근 예닐곱 차례가 전부였다.
성균관 행사 때 행렬을 안내하는 이욱 수복(맨 앞). 성균관 제공
성균관 지킴이 김인겸씨의 남편 이정우 수복이 성균관 문묘를 참배하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옆에 서있다. 성균관 제공
하지만 김씨는 만세의 사표인 공자님을 가깝게 모신다는 기쁨으로 살아왔다. 대성전에 들어가면 누가 봐도 정성이 담긴 대형 방석이 한가운데 놓여 있는데, 그것도 김씨가 사비를 들여 손수 만든 것이다.
“날마다 대성전을 청소하다 보니 늘 공자님 곁에 있는 것 같았는데, 공자님이 한겨울 추위에 떨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동대문시장에 가서 고운 공단을 떠서 솜을 넣고 방석을 해다가 위패 앞에 놓아드렸다. 한번은 대성전 청소를 하고 있는데, 시골에서 올라온 할아버지가 ‘누가 이렇게 좋은 방석을 내놓았냐’고 해서 ‘제가 해드렸다’고 했더니 ‘어떻게 공자님이 상가지구(상가집의 개)처럼 추위에 떨고 지냈다는 것을 알았느냐’고 물으며 대견해 했다.”
성균관 지킴이 김인겸씨와 수복 이욱씨 모자가 석전대제 등 성균관과 문묘의 큰 행사를 준비하던 장소인 대학당 앞에 서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성균관에서 태어나 자란, 김씨의 장남 이태형씨는 “성균관에서 60년 넘게 살면서 소중한 유무형 자산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아 후손들에게 계승해온 어머니를 철거민처럼 쫓아내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항변했다.
성균관 관계자들은 불국사 등 문화재 공간에서 스님들이 거주하며 문화재를 가꾸고 있는 것과 달리 성균관에서만 원거주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형평에 어긋난다고 항변한다. 오흥녕 <유교신문> 주간은 “동아시아의 정신을 지탱해온 유교의 본고장 중국이나 일본에서 석전 등 주요 행사의 전통이 멸실된 것과 달리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보존되고 있는 것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같은 격동기를 거치며 정부의 실질적 지원이 끊겼는데도 수복 등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제례 봉행, 시설 관리, 건물 보전 등 전통을 온몸으로 체득해온 김씨를 무형문화재로 인정하지는 못할망정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처사”라고 지적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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