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별세한 고 조성범 겨레살림공동체 운영위원장. 필자 조성범 교감 제공
‘심심상인’(心心相印)이랄까. 주말엔 굳이 약속하지 않아도 별다른 개인사가 없으면 주말농장에서 형을 만나곤 했다. 지난 13일에도 내가 먼저 도착해 돌미나리전을 부쳐놓고 형을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형은 오지 않았다. ‘관악산 심장마비사, 향년 65.’ 청천벽력 같은 소식만 전해왔다 6·15남북공동선언은 아직도 미완의 진행형인데, 형께서 하실 일이 아직도 가득한데. 아! 황망하고 원통합니다.
나와 형은 절묘한 인연이다.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경기도 군포의 같은 지역에 살았고, 같은 곳을 향해 걸었고, 심지어 ‘동명이인’이다. 그래서 형 이름 앞에는 ‘통일’을, 내 이름 앞에는 ‘교육’을 호처럼 붙여 혼선을 예방(?)하기도 했다.
형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많은 분들이 알고 있듯이 고 조용술 목사(범민족대회 남측본부 공동대표)의 장남이다. 1975년 한신대에 입학한 형에게 시대는 순탄한 목회자의 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개인의 인권을 짓밟고 민주주의를 유린한 군부독재의 폭력적 만행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학문에 매진할 수 없었다. 형은 분연히 떨쳐 일어나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나섰다. 이때부터 고난과 역경의 삶도 시작되었다.
1979년 형은 노동자들의 벗이 되고자 인천의 노동현장으로 달려가 1991년까지 노동자 권익향상을 위해 함께 싸웠다. 1991년 12월 전국연합 결성 이후에는 자주통일위원장의 중임을 맡아 헌신했다.
1990년대 중반 조국통일범민족연합, 2000년대는 6·15남북공동선언실천 남측위의 건설에 동참하고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그뒤 남북농업발전협력민간연대(남북농발협) 사무총장, 민화협 남북협력사업단 사무처장을 거쳐 녹색평화공동체 운영위원, 겨레살림공동체 운영위원장, 겨레사랑 이사 등 오로지 남북교류협력과 한반도 평화 증진에 매진해왔다.
언젠가 형은 통일운동가로 평생을 살게 된 사연을 직접 들려줬다. 1991년 선친 조 목사님께서 남·북한과 해외동포 대표들의 통일운동협의체 결성을 위한 ‘베를린 3자 회담’에 참석했다가 구속되면서 자연스럽게 통일 문제에 관심이 생겼고, 마침 그해 8월 범민족대회에 실무자로 참여하면서 통일운동에 매진하게 된 것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의 역사적 장면을 지켜볼 때도 형은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았다. 평화통일 운동가로 평생을 살아온 형의 가장 큰 자산은 치열함과 넉넉함이다. 그 넉넉함은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결론은 풍부한 상상력과 통찰력이었다. 국제정세(질서)와 북미관계에 대한 풍부한 식견과 예리한 통찰력으로 통일운동의 지평을 넓히는 데 크기 기여했다.
형의 통일운동의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 중에서도 2000년 남북농발협의 ‘씨감자프로젝트’를 잊을 수 없다. 북한 식량지원 사업의 하나로 씨감자를 북에 직접 제공하는 사업이었다. 그때 300톤 정도의 씨감자를 북에 직접 보냈다. 형이 ‘씨감자프로젝트’를 추진한 이유는 북의 기후와 토양을 고려할 때 감자재배가 최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사업이 남북교류협력에 기여할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지난해 4월 전북 군산 여행 때 기념사진. 앞줄 왼쪽 필자 조성범 교감과 고 조성범 겨레살림공동체 운영위원장이다. 필자 제공
2019년 내가 경기도 교육청 근무를 마치고 학교 현장으로 복귀하면서 우리는 함께 산행을 자주 했다. 최근에는 9988인생이모작 협동조합에 함께 참여하면서 노년의 건강한 삶을 그리기 시작했다. 굴업도 백패킹과 군산 여행이 마지막 추억이 될 줄이야.
돌이켜보면 형 내게 친구였고, 동지였고, 스승이었다. 이 땅의 인권과 민주주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해 오직 한 길을 걸어온 형의 넉넉한 품은 생과 사를 넘어 우리의 심장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형님, 영전에 국화 한 송이 바칩니다.
조성범/궁내중 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