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타이베이에서 열린 ‘차이루이웨 국제무용축제’ 초청 무대에서 ‘태평무’를 선보이고 있는 고 이애주 선생. 옌유산 제공
2019년 ‘차이루이웨 국제 무용축제’ 초청
차이루이웨는 ‘타이완 현대무용 선구자’
‘춤으로 사회운동 참여’ 고인과 닮은 꼴
타오위안 공항부터 5일간 통역 맡아
“마지막 외국공연 동행한 특별한 경험”
“춤시 같은 무대…밤하늘 별처럼 눈부셔”
1987년의 한국의 6월 민주항쟁은 대한민국을 민주화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같은 해 타이완도 1949년 발포됐던 계엄령이 해제됐고 38년 동안 집권했던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다. 한국과 대만은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민주화되었다.
2019년 타이완
차이루이웨(채서월·1921~85) 무용연구소는 ‘제14회 채서월 국제 무용 축제’에 이애주 선생을 타이베이로 초청했다. 이애주 선생은 대한민국의 국가무형문화재 ‘승무’의 예능보유자이자 서울대 교수였다. 이애주 선생은 1987년 학생운동가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서 ‘한풀이춤’으로 망자의 원혼을 달랬다. 채서월 선생은 타이완 현대무용의 선구자이다. 평생 춤으로 사회운동에 투신했고, 불의와 부정에 항거했다. 이애주 선생과 채서월 선생의 춤 유형은 많이 다르다. 그러나 춤으로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고 사회에 참여하는 정신은 일맥상통하다.
타이완 현대무용의 선구자로 불리는 차이루이웨(채서월)의 말년 모습(왼쪽)과 2017년 2월 ‘대만의 역사는 대만인이 작성해야 합니다’를 주제로 열린 ‘차이루이웨 국제무용제’ 포스터.(오른쪽) 사진 차이루이웨무용연구소(중화무도연구사) 제공
나는 이 선생의 수행 통역을 맡았다. 타오위안 공항에서 처음 만난 이 선생은 생각보다 키가 작아 보이고 근엄한 표정이었으나, 따뜻한 웃음으로 나를 대해 주셨다. 짧고 세련된 검은 머리에 검은 바지 차림은 참 우아했다. 리허설을 하며 이 선생은 기자회견에서 낭독할 시(‘생명의 춤’)를 읽어 주었다.
“춤은 세상을 관(觀)하고 자기를 비우는 예(禮)의 몸짓이다/ 동시에 역사에 나타난 사회, 정치, 문화의 시대정신이다/ 오늘 추는 태평춤은 한국의 격동의 시기에 억울한 원혼을 달래주었고 지금 미래를 향한 몸짓이다/ 통곡의 몸짓이며 평화의 몸짓이다/ 태평(太平)은 크게 평평하고 안락하다는 뜻이다/ 영원한 무궁(無窮)평화이다/ 춤은 태어나고 죽는 생명의 이치와 우주의 원리이다/ 또한 춤은 영혼을 부르는 소리와 몸짓이다/ 춤은 선과 악이, 주와 객이, 생과 멸이 있고도 없다/ 춤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생명 창조의 몸짓이다/ 태평춤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심을 이루는 평화의 춤이다/ 우리의 행동과 몸짓이 바른 정신으로 이어져 태평춤을 함께 출 수 있는 세상을 바라고 또 바란다.”
2019년 차이루이웨 국제무용축제 초청 공연에 앞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이애주(오른쪽) 선생과 필자 옌유산(왼쪽) 통역. 사진 옌유산 제공
선생이 연출한 춤은 이한열 장례식에서 펼쳤던 ‘한풀이춤’이 아니라 세계 평화를 바라고 억울한 영혼들을 달래는 ‘태평춤’이었다. 마침 홍콩 시위를 응원하는 무용 축제의 주제와 일치했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흰색 한복을 입은 선생은 무대 구석에서 등장하고 리듬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생은 기둥 사이에 우아하게 왔다 갔다 하며, 마치 밤하늘에 별처럼 눈부셨다. 선생은 현장에 있던 관중의 반응에 따라 즉흥적으로 춤을 추어 공연 하나하나가 유일무이했다. 감정이 고양되면 무대 밖으로 나가 마룻바닥에서 몸을 펼치고 감정이 가라앉으면 조명을 통해 어둑어둑한 모습으로 춤을 선보였다. 선생의 춤은 생명력이 가득 찬 시처럼 간결한 동시에 무궁무진한 힘이 담겨 있었다.
2019년 차이루이웨국제무용축제 때 이애주(오른쪽 셋째) 선생 공연단과 필자 옌유산(왼쪽 셋째) 통역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옌유산 제공
선생은 1970년대부터 사회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남의 권유나 강요 때문에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자각하고 나서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선생은 1987년 시국 현장에서 췄던 ‘한풀이춤’이 이처럼 커다란 영향을 미칠 줄 몰랐다고 답했으며 겸손하게 자신이 단지 매일매일 꾸준히 연습해왔고 때가 되어 춤췄을 뿐이었다고 했다.
선생의 춤은 하늘, 땅, 사람, 그리고 우주와 인생 원리를 담아냈다. 선생의 춤은 한국 전통 종교와 문화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현대무용이 아닌 전통무용이 젊은 세대에게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선생의 대답은 이런 선입견을 바꾸었다. 춤은 사람을 달래는 예술이다. 선생은 자신과 다른 춤 유형을 수용하고 폭넓은 마음으로 세상과 소통했다. 선생의 춤은 자아에서 비롯된 가장 순수한 몸짓이다. 선생은 춤을 통해 사회에서 다친 영혼들, 그리고 이 만신창이가 된 시대를 달랬다. 춤은 곧 정치다. 예술은 곧 정치다. 전통춤의 맥을 잇는 춤꾼. 이것이 바로 ‘시국 춤꾼’ 이애주의 생명 춤시였다.
이애주 선생은 인생의 마지막 외국 공연을 타이완에서 했다. 나는 영광스럽게도 5일 동안 선생과 동행하며 지근거리에서 선생의 말씀과 춤 사상을 지켜봤다. 한국인들도 해보지 못한 특별한 경험이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나의 경험을 공유하고, 이 글을 천국을 무대로 춤을 추고 계실 시대의 춤꾼 이애주 선생님에게 바친다.
타이페이/옌유산
(필자 옌유산(안우산)은 1996년 타이완에서 태어나 국립정치대학교 방송학과를 졸업한 뒤 게임회사에서 마케팅 플래너로 근무하고 있다.)
지난 5월10일 별세한 이애주 선생의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타이완의 차이루이웨무용기금회에서 보낸 조화(맨오른쪽)가 놓여 있다. 옌유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