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남북공동선언’ 32돌인 새달 2일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될 고 정경모 선생의 영정. 유족대표 정진영씨 제공
우리시대 ‘마지막 망명객’이 끝내 유골로 귀국했다. 51년 만이다.
지난달 16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별세한 재일 문필가이자 통일운동가 정경모(1924∼2021) 선생의 유골이 새달 2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봉안된다. 고인의 유골은 지난 19일 서울 강동구에 사는 동생 고 정성모씨 가족의 집에 도착했다. 이로써 1989년 3월 방북해 ‘4·2 남북공동 선언’을 끌어냈던 ‘문익환·정경모·유원호’ 3인이 32년 만에 고국 땅에서 영혼 재회를 하게 되는 셈이다.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고 정경모 선생 유해봉안위원회는 오는 31일부터 이틀 동안 서울 중구 충무로역 5번 출구 ‘공간 채비’(한겨레두레협동조합 추모공간)에서 시민 조문을 받는 한편 추모식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24일 밝혔다. 이어 2일 마석 모란공원에서 봉안식이 열린다.
유해봉안위는 송경용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이사장(신부), 이승환 통일맞이 이사장,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 이창복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 조성우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임재경 <한겨레> 초대 부사장,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이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추도식은 오는 1일 오후 4시 서울 종로 수운회관에서 50여명 정도만 참석해 약식으로 열린다. 1부에서는 4·2선언 32돌 기념식을 통일맞이와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주도로 하고 2부는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소속 평화의나무합창단(지휘 이현관)과 이소선합창단(단장 임정현) 등이 추모곡을 헌정한다.
망명 51년 만에 넋으로 귀국한 고 정경모 선생의 유골함. 31~4월1일 서울 충무로 공간 채비의 빈소에서 시민 조문을 받는다. 유족대표 정진영씨 제공
봉안식은 2일 오전 11시 강북구 수유리 통일의집에서 노제를 지낸 뒤 오후 2시 모란공원에서 진행하는 일정이다.
조성우 위원장은 “일본에 있는 부인과 자녀들은 모두 한국 국적인데 코로나 19 상황에서 자가격리는 물론 일본으로 재입국하기가 쉽지 않아 귀국하지 못했다. 서울에 사는 조카가 유족을 대표해 조문객을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인의 맏아들 정강헌(67)씨는 지난 19일 “부친의 유골을 요코하마와 한국의 선산, 그리고 모란공원 세 군데에 모시고자 분골을 해서 보냈다”고 전했다.
일본의 유족들은 고인의 생전 소신에 따라 일본 귀화를 하지 않은 까닭에 노인연금 등 일체의 복지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해봉안위는 추모의 마음을 모으고자 봉안위원과 기금도 모집하고 있다. 참여는 링크(https://url.kr/dx4mgb)를 통해서 누구나 할 수 있고, 추모기금은 1만원 이상(우리은행 1005-103-969889/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을 계좌로 직접 보내면 된다. (02)392-3615.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기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일본 게이오대 의학부 본과 재학 중 도쿄공습을 피해 광복 직전 귀국했다. 서울대 의학부에 편입했다가 47년 국비장학생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에모리대학(화학 전공)에서 유학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연합군의 맥아더사령부 통역관으로 차출되어 문익환·박형규 목사와 함께 활동했다. 특히 판문점 휴전회담에 통역관으로 배석해 북위 38선을 경계로 휴전선이 설정되는 순간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1970년 박정희 군사독재에 반대해 일본으로 건너간 고인은 73년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사건 때 구명운동을 벌였고, 김지하 시인 석방운동 등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씨알의 힘>을 발행하는 등 언론 활동도 활발하게 했던 고인은 특히 여운형·김구·장준하 3명이 만나 가상의 대화를 나누는 ‘운상경륜문답’(雲上經綸問答)의 필자로 국내에도 알려졌다. 1980년대 한국에서 <찢겨진 산하>라는 제목으로 해적 출간된 이 책은 대학가 운동권의 필독서로 인기를 끌었다. 2009년 <한겨레> ‘길을 찾아서’ 연재를 통해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과 민족통일의 의지를 밝혀 독자들의 호응을 받았다.
1989년 3월 말 문익환(1918∼94) 목사와 함께 방북한 고인은 김일성 주석을 만난 뒤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장과 4·2공동성명의 초안을 작성해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문 목사 등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고 고인의 귀국길도 막혔다. 민주화 이후 문재인 정부에서까지 조사를 받고 ‘자수서’를 쓰면 귀국을 허가하겠다는 공안당국의 제안을 수차례 거부한 채 일본에서 생을 마쳤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