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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궂긴소식

“거물들 정치테두리 메이지 않았던 ‘창조적 경계인’이셨죠”

등록 2020-07-23 21:59수정 2022-03-17 12:09

1970년대 중반 ‘진고개식당’ 첫 만남
문익환·박형규 등과 ‘반유신’ 투사로

“집권당 실세에서 민중돌보미 자처
정치인이되 정치꾼인 적 없는 지사”
[가신이의 발자취] 예춘호 선생의 떠남을 아쉬워하며

고 예춘호(뒷줄 가운데) 의원이 1964년 공화당 사무총장 시절 대통령 박정희(맨 앞)의 연두 순시 때 배석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고 예춘호(뒷줄 가운데) 의원이 1964년 공화당 사무총장 시절 대통령 박정희(맨 앞)의 연두 순시 때 배석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떠날 때 더욱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 가슴 시린 아쉬움과 그리움을 남기고 가는 정치인이 있다. 그런 분은 자기를 옥죄는 견고한 정상성의 벽을 느끼게 되면 그 벽을 주저 없이 뛰어넘는 창조적 비동조자다. 그는 자기 성 중심부에서 들려오는 북소리보다 성 밖에서 울려오는 북 소리에 장단 맞춰 더 신나게 움직이는 창조적 경계인이다. 그래서 그의 떠남은 아쉬움의 울림을 남긴다. 지난 22일 아흔 네살로 세상을 떠난 예춘호 선생이 바로 그런 분이다.

창조적 경계인을 간단히 한갈래 범주로 분류할 수 없다. 지역, 이념, 종교, 출신 학교로 그를 판단할 수 없다. 예 선생은 보수에서 진보로 나아갔고, 경상도인에서 대범관후한 대한인으로 나아간 분이다. 그래서 그런 분의 삶에는 감동적 울림이 있게 마련이다.

내가 예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서울대에서 쫓겨나 들판에서 신나게 고생할 때였다. 집권 공화당에서 뛰쳐나온 양순직, 박종태 선생과 함께였다. 그들은 겁없이 유신체제와 싸우고 있던 박형규, 문익환과 같은 재야 인사들과 만나 깊은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1970년대 중반, 어느날 명동 진고개 식당에서 우리 모두 만났다. 그들은 부끄럽다고 했다. 유신체제와 맞서 싸우는 성직자들의 그 헌신적 투쟁에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놀라고 감동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치인들을 보고 절망했던 나는 그들의 솔직한 고백을 듣고 흐뭇하게 놀랐다. 유신권력 핵심부에서 박정희, 김종필 같은 거물을 따랐던 실세들의 솔직한 술회에서 우리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특히나 예 선생은 집권당의 사무총장으로서 3선개헌을 반대했으니 그의 용기 있는 비동조행위를 지금의 보수 정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파당적 기득권에 매달려 정치에 대한 국민적 절망과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정치인들과는 너무나 결이 다른 것이다.

그 모임을 계기로 나는 예선생과 매우 친해졌다. 기득권을 헌신짝처럼 팽개친 그는 진짜 통합적 지도력을 재야 벌판에서 여실히 보여주었다. 우리 정치판에서 유령처럼 떠돌아다니는 얄팍한 유사(사이비) 통합이 아니라, 신념과 원칙에 깊이 뿌리내린 자기비움의 힘으로 보여주는 통합력이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법.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거친 좌우 바람이나 높고 낮은 폭풍 속에서 자유롭게 흔들리면서도 든든하게 버티는 거목이 바로 예 선생의 모습이었다.

내가 그 울림의 도움으로 한국정치를 좌지우지했던 분들을 비판한 적이 있다. 특히 박정희시대 제2인자였던 김종필(제이피)을 두고 했던 말이 있다. “박정희가 3선개헌을 추진했을 때 제이피는 목숨을 걸고 반대했어야 마땅하다. 그때 제이피가 만약 그렇게 용기 있게 대응했다면 그뒤 박정희도 살렸을 것이고, 지금쯤은 민주주의도 꽃피었을 것이다”(나의 자서전 <사자가 소의 여물을 먹고>에서) 그런데 제이피는 원칙으로 반대해야 마땅할 때 사사로운 인정에 메어 순응했고, 용기로 발언해야 할 때 인내로 침묵했었다. 이때 예 선생은 지사다운 기품으로 성 밖에서 들려오는 국민적 민주화 촉진 북소리 듣고 창조적 비판자로서 문익환·이문영·박형규 등과 손잡고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뛰어들었다.

예 선생과 나는 1980년 서울의 봄 시기에, 권력찬탈을 한 신군부에 의해 일망타진의 대상이 되었다. 남산 지하 2층에 끌려가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었다. 특히 지역 혐오감에 냉전 적개심을 섞어 엮어내는 욕설이 고통스러웠다. “국가관과 애국심도 없는 ‘경상도 놈’이 ‘전라도 놈’을 대통령으로 옹립하겠다고….” 참으로 어이없고 수준 없는 막말고문이었다. 그때 예 선생은 육체적 고문도 심하게 겪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립다. 선생은 경상도 사나이다. 그러나 경상도 정서로 다른 지역 사람들을 혐오하지 않았다. 하기야 한국에서 지역감정정치로 선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군사정권 때부터다. 예 선생과 나는 경상도 사람이지만 김대중씨를 대통령으로 적합한 역사의식과 식견과 철학을 지닌 민주·평화지도자로 믿었기에 그를 지지했지, 그가 전라도 사람이기에 지지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디제이는 전라도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경상도 정권에 의해 더 미움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1974년 집권 공화당을 탈당하고 반유신 민주화운동에 나선 고 예춘호(뒷줄 맨왼쪽) 의원은 1980년 ‘김대중(앞줄 왼쪽) 내란음모조작 사건’ 재판에서 12년형을 선고받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1974년 집권 공화당을 탈당하고 반유신 민주화운동에 나선 고 예춘호(뒷줄 맨왼쪽) 의원은 1980년 ‘김대중(앞줄 왼쪽) 내란음모조작 사건’ 재판에서 12년형을 선고받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선생은 우리와 손잡고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사건에 휘말려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 무시무시했던 전두환 군사재판정에서도 선생과 이문영 박사, 문익환 목사는 용기 있게 항거했다. 특히 예 선생은 김대중 총재의 석방을 요청했다. 그런데 1987년 민주세력이 분열되어 그해 대통령선거에서 석패했다. 야권 단일화 실패로 좌절했던 선생은 그뒤 젊은 정치인들과 함께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했다. 그 대표를 맡아 혼신의 힘으로 노력했으나 결과는 또 다시 참담했다. 이때 그는 책임 있게 행동했다. 깨끗하게 정계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즉각 다시 들판으로 나와 민주화운동을 돕기로 했다. 그때 그의 물러남은 아름다운 퇴장이었다.

선생은 일찍이 부산에서 검은 고무신을 신고 검소한 복장으로 거리를 활보했는데 그 모습 또한 신선했다. 부산 시민들은 그에게 경외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정치인이되 정치꾼으로 행세한 적 없었다. 그의 풍모와 태도는 항상 지사다웠다. 행동하고 실천하는 지식인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한때 보수당의 막강한 핵심자리에 있었으나 고무신 신고 다니는 이들의 애환을 살피며 ‘민중돌보미’ 노릇을 자처했다. 그는 박정희, 김종필, 김대중, 김영삼 등 거물 정치인들과 잘 아는 처지였으나, 그들의 정치테두리에 결코 메이지 않았던 자유인이었다. 창조적 경계인이요, 대안을 모색하는 비동조자였다. 그래서 지금 세계적 역병으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이때 그의 떠남이 더욱 애석하다. 이제 정말 편히 쉬소서.

한완상/전 통일부총리

1980년 1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56살 생일 축하 모임이 열렸다. 왼쪽부터 김종완·필자 한완상·문동환·김대중·이희호·한승헌·김용복·예춘호·이해동. <한겨레> 자료사진
1980년 1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56살 생일 축하 모임이 열렸다. 왼쪽부터 김종완·필자 한완상·문동환·김대중·이희호·한승헌·김용복·예춘호·이해동.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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