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이의 발자취] 다큐멘터리스트 고 정수웅 감독을 기리며
2017년 10월 다큐멘터리 <고향이 어디세요> 시사회 때의 고 정수웅 감독. 마지막 작품이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70년대 후반 방송대상 휩쓴 ‘전설의 대피디’
전두환 전기 제작 거부하고 82년 일본으로
3년뒤 귀국 독립제작사 ‘서울다큐’ 설립 85년 ‘우도 해녀의 출가’ 조연출로 인연
“다큐멘터리는 저널리즘이다” 어록 생생
2018년 파킨슨병 투병중에도 ‘작품’ 열정 나와 고인과의 인연은 3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5년 6월 문화방송(MBC) <인간시대>에서는 ‘현해탄 저편, 의지의 젊은 3세들’이라는 재일한국인 3세들의 성공담과 활약상을 취재한 프로그램을 3부작으로 방송했다. 재일 사업가 손정의, 야구 선수 김의명, 연극인 김수진 등이 소개된 이 프로그램의 포스트 프로덕션 과정에 들어가면서 정 감독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이어서 제주도 해녀 다큐멘터리인 <우도 해녀의 출가>에서 조연출로 호흡을 맞추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다큐를 하고 싶어 지원한 1년차 피디에게 찾아온 행운이었다. 정 감독에 대해서는 일찍이 <초분>(1977), <석남사>(1978), <신라의 신비 대왕암>(1980)과 같은 한국문화의 원형과 원류를 찾는 프로그램으로 일가를 이룬 ‘대피디’라는 소문을 들은 터였다. 특히 진도의 장례 풍습을 담은 <초분>으로 ‘다큐멘터리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골든 하프상’(유럽 방송연맹 주최)을 수상했다. 방송대상 4년 연속 수상과 같은 전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렇게 잘 나가던 그가 1982년 <한국방송>을 그만 두고 일본의 니혼오디오비주얼센터(NAV)로 건너간 이유도 범상치 않았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의 전기 <황강에서 북악까지>를 영상으로 연출하라는 윗선의 지시를 거부했던 것이다. 그러니 갓 입사한 새내기 피디로서 거장 선배를 모시는 것은 쉽지 않은 기회였다. 현장에서 그는 무서운 집중력으로 몰입하는 방식이었다. 형형하고 부리부리한 그의 눈빛을 보면서 무엇을 고민하는지를 생각하고 미리 준비해야 했다. “다큐멘터리는 기다림의 미학이다”, “다큐멘터리는 시대정신이다” “다큐멘터리는 저널리즘이고 다큐멘터리스트는 저널리스트다” 등 주옥같은 어록들도 그때 실시간으로, 육성으로 들었다. 대학 시절 국립병원의 시체안치실에서 주검을 운반하는 아르바이트를 오래 했다는 ‘무용담’에는 모골이 송연해지기도 했다. 저 유명한 “다큐멘터리스트는 우주에서 파견된 스파이”라는 말도 정 감독의 어록이다. 그때는 이 말을 대선배의 호연지기(?)쯤으로 여기고, 우주를 칼 세건의 ‘우주’(Cosmos)로 알아들었다. 그런데 어떤 인터뷰에서 그가 “우주는 각자의 마음(하트)이다. 인간 자체가 소우주다. 다큐멘터리는 자기 속에서 나와서 자기를 나타낸다”는 답을 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1985년 일본에서 돌아와 독립제작사 <서울 다큐>를 설립한 이후로 정 감독의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영상 총감독을 필두로 이후 포로감시원, 캄차카의 한인들, 압록강과 두만강에서 만나는 사람들, 미소의 실크로드, 최승희, 명성황후 시해사건 등 그가 다룬 다큐의 소재는 영역과 시대에서 제약이 없었다. 독립피디로서 자유롭고 과감한 상상력은 아마도 지상파 다큐의 기획과 발상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다큐를 지망하는 후배들에게 세 가지를 당부했다. “열린 마음으로 대상을 대할 것, 촬영하고자 하는 대상에 애정을 가질 것. 인내력을 가지고 기다릴 것”(
2019년 4월 고 정수웅(왼쪽) 감독이 불교 신행공동체 붓다회 회장 성우(오른쪽) 대종사에게 자문위원 위촉장을 받고 있다. 생전 마지막 활동인 셈이다. 사진 BTN불교TV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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