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궂긴소식

“쌀한톨 남기지 않고 떠난 장준하 선생…함께 살아낸 삶 거룩하여라”

등록 2018-07-02 20:36수정 2022-03-17 12:15

[가신이의 발자취] 김희숙 형수님을 그리며
백기완(오른쪽) 통일문제연구소장이 2일 오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고 김희숙 여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1967년 고 장준하 선생과 함께 백범사상연구소를 세워 가장 먼저 반유신 투쟁에 나섰던 백 소장은 지난 4월23일 심장수술을 한 이후 회복중에 첫 외출을 했다. 사진 채원희씨 제공
백기완(오른쪽) 통일문제연구소장이 2일 오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고 김희숙 여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1967년 고 장준하 선생과 함께 백범사상연구소를 세워 가장 먼저 반유신 투쟁에 나섰던 백 소장은 지난 4월23일 심장수술을 한 이후 회복중에 첫 외출을 했다. 사진 채원희씨 제공
오늘 오전 장호권이로부터 어머니께서 눈을 감으셨다는 전화를 받자마자 내 얼굴엔 그야말로 피눈물로 범벅이 돼 앞이 안 보였다. 장준하 선생님과 한살매(일생)를 같이 해온 김희숙 형수님이 내 눈자위를 마구 후벼 파신다. 한참을 펑펑 울다가 눈물을 거두고 붓을 들었으나 앞이 안 보이는 건 매한가지였다.

바로 두 달 앞서다. 무슨 일로 병원에서 정신을 잃고 있는데 병상의 꿈에서 형수님의 한마디에 번쩍 깨어났다. “이봐 백기완이, 우래옥에 가서 냉면 한 그릇 산다더니 누워만 있으면 어떻게 해, 어서 일어나.” 이 말에 눈을 뜨고 나서도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마 1960년 말쯤일 거다. 장 선생님과 함께 등산을 갔는데 너무나 힘이 들어 내 윗도리를 벗어 형수님 등에 올려놓았더니 비웃으시는 것 같아 나도 반격 아닌 목소리를 돋구었다. “나는 요, 해방통일의 짐만 지지 이따위 옷가지는 아니 지거든요.” 그러자 형수님 말씀이 “통일의 짐 따로 있고, 힘들 때 지는 짐 따로 있다던가.” 나는 귀싸대기가 얼얼, 그때부터 나는 이따금 장준하 형님한테는 가슴을 들이대는 적은 있었어도 형수님한테는 늘 말을 골라 하곤 했다.

1973년 어느 추운 날, 등산에서 내려오시던 장준하 선생님이 청평호에서 ‘빠른 배’(모터보트)를 한번 탈 수 없을까 그러신다. 그날 함께 갔던 배기열 교수 보고 빠른 배를 탈 잔돈이 있느냐고 하니 있다고 한다. 서둘러 내려갔으나 그날따라 꽁꽁 얼붙어 뜻을 못 이루고 어느 더듬한 막걸리 집에서 형수님한테 예정에 없던 회초리를 또 주어 맞았다. “이봐 백기완이,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으면 사내들은 술을 마신다, 아니면 빠른 배를 한번 씨원하게 타보겠다 그러지? 하지만 우리 아낙네들은 거기서 다르다는 걸 알아야 돼.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우리 아낙네들은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 알겠어. 사내놈들 더욱 분발해야 할 거야.”

1975년 여름 장준하 선생님이 등산길에서 참혹한 암살을 당하고 나서다. 나는 너무나 원통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밤이 깊어지면 꼬박껏 형수님한테 전화로 노래를 들려드리곤 했다. “강물도 달밤이면 목 놓아 우는데/ 님 잃은 그 사람도 한숨을 지으니/ 추억에 목 메인 애달픈 하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부르고 또 부르곤 했지만, 실지로는 우리 장준하 선생님을 무자비하게 암살한 박정희 유신독재 타도운동에 온몸과 온몸의 분노를 들이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형수님께서 “이봐 백기완이, 박정희가 우리 남편 장준하를 암살했다고, 백기완이 입으로 내 귀에 대고 말을 했잖아. 그렇다고 하면 원수를 갚을 생각을 해야지, 맨날 노래만 부르면 어떻게 해” 그러신다. 바로 그 다음날부터, 자그마치 여섯 달 동안 밤만 되면 부르곤 하던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를 딱하고 끊었다.

아, 우리 김희숙 형수님, 그 분은 참말로 어떤 분이셨을까. 아마도 지난 60년대 중반쯤일 게다. 형수님께서 날 좀 보자고 해 갔더니, 내 눈으로는 처음 보는 땅문서를 내놓으면서, 이걸 장준하 형님이 알고는 대뜸 없애라고 하신다며, 하라는 대로 하긴 하겠지만 만약에 이것마저 없애면 아마도 우리집은 쌀 한 되 없는 ‘깡빌뱅이’가 될 것이니 형님한테 그러질 말라고, 말 좀 해달라고 한다. 이때 나는 배시짝 마른 침을 한 두어 번 삼키고선 “안 됩니다, 우리 형님은 독립군이 아니었습니까. 독립군이 남의 나라를 침략한 제국주의를 타도해야지, 그까짓 땅문서나 가지면 되겠어요. 그러니 형수님이 물러서야 합니다.”

백기완(왼쪽) 통일문제연구소장이 2일 오후 서울대병원의 김희숙 여사 빈소를 찾아 고인의 아들 호권(가운데)·호성(오른쪽)씨를 위로하고 있다. 사진 채원희씨 제공
백기완(왼쪽) 통일문제연구소장이 2일 오후 서울대병원의 김희숙 여사 빈소를 찾아 고인의 아들 호권(가운데)·호성(오른쪽)씨를 위로하고 있다. 사진 채원희씨 제공
그 뒤다. 장 선생님이 암살당하신 날, 저 포천 산골에서 주검의 머리는 내가 들고, 허리는 첫째아들(호권), 다리는 둘째아들(호성)이 들고 내려와 상봉동 사글세 이십만 원짜리 셋집에 뉘우는데, 머릴 받쳐 들었던 내 손에 섬짓 피가 흐른다. 놀라 살펴보니 왼쪽 귀밑에 날카로운 도끼질에서 나오는 피다. 그런데 높은 바윗돌에서 떨어지셨다면 바위에 스친 자국, 어려운 말로 찰과상이 있어야 할 터인데 그게 없는 거라. 나는 함석헌·문익환·계훈제 선생한테 “장준하 형님은 박정희의 직접적 암살이라”고 귀띔을 하고는, 이제부터 우리의 싸움은 그 암살의 실상을 폭로하고 나아가 박정희 유신독재의 결정적 타도를 위해 힘을 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문 목사가 앞장 선 이른바 3·1 구국선언이 성사되도록 도왔다.

이야기 하나만 더 붙이고 싶다. 장준하 선생님의 장례를 집에서 치르는 데 합의하고, 형님댁 뒤주를 열어보니 쌀이 한오큼도 없는 거라. 너무나 놀라 형수님, 쌀 뒤주가 왜 이렇지요, 했더니 그걸 이제야 알아? 그런다.

아, 뒤주에 쌀 한오큼도 아니 남기시고 박정희 유신독재 타도운동을 하시다가 암살된 장준하 형님, 그런 형님과 사시다 가신 우리 김희숙 형수님, 위대하진 못해도 더없이 거룩하신 건 틀림없지 않을까.

형수님, 이 못난 기완이는 상기도 이렇게 어설프게 뉘우치고만 있습니다, 형수님.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박근혜보다 죄 큰데 윤석열 탄핵될지 더 불안…그러나” [영상] 1.

“박근혜보다 죄 큰데 윤석열 탄핵될지 더 불안…그러나” [영상]

봄 같은 주말에도 10만 깃발…“소중한 사람들 지키려 나왔어요” 2.

봄 같은 주말에도 10만 깃발…“소중한 사람들 지키려 나왔어요”

윤석열 쪽, 헌법재판관 3명 회피 촉구 의견서 냈다 3.

윤석열 쪽, 헌법재판관 3명 회피 촉구 의견서 냈다

월요일부터 -10도 다시 맹추위…내일까진 평년보다 포근 4.

월요일부터 -10도 다시 맹추위…내일까진 평년보다 포근

검찰, ‘윤 체포 저지’ 김성훈·이광우 구속영장 또 반려 5.

검찰, ‘윤 체포 저지’ 김성훈·이광우 구속영장 또 반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