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5월14일 저녁 서울 양평동 한겨레신문사 윤전실에서 윤정옥(왼쪽부터) 이화여대 교수, 조성숙 생활환경부 편집위원, 이효재 이사가 갓 찍혀 나온 <한겨레> 창간호(5월15일치)를 보며 기뻐하고 있다.
[가신이의 발자취] 조성숙 전 동아투위 위원장이 남긴 ‘한겨레와 나’
지난 19일 별세한 조성숙 전 동아투위 위원장은 1987년 한겨레신문 발기인으로 참여한 뒤 논설위원과 기획위원을 지냈다. 고인은 언론인생 30여년 가운데 4년 남짓에 불과했던 이 시절을 자전적 에세이 <한겨레와 나>(2014년)에서 “내 모든 것을 바친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신장 질환 등으로 지난 10년 휠체어 생활을 했던 고인은 불편한 손과 흐려진 기억을 되살려 2년 넘게 이 회고록을 썼다. 이 글의 한 대목인 ‘한겨레에서의 여성운동’ 가운데 일부를 ‘추모의 글’로 갈무리한다. 여성학자이기도 했던 고인은 한겨레 재직 때의 여성운동을 가장 보람 있는 일로 여겼다.
‘한겨레’가 창립된 이듬해 신입사원 모집을 했다. 구름처럼 지원자가 몰려왔다. 회사는 중앙대를 빌려 필기시험을 치르기로 했다. 따라서 시험 감독관도 많이 필요한데 여사원은 제외한다는 것이다. 그날이 일요일이고 여성을 배려하는 의미인 것 같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시험 감독처럼 수월한 일에서 여성을 배제한다면 여성 사원의 입지가 곤란해질 것 같았다. 누구와 의논도 하지 않고, 나 혼자 윗분을 만나 여사원도 시험 감독을 하게 해달라고 청했더니 어렵지 않게 승낙이 떨어졌다.
그리고 얼마 뒤 숙직 제도를 부활시킨다는 것이다. 역시 여사원은 제외되었다. 애사심은 남녀가 같은데 숙직을 왜 못하나 해서 나 혼자 생각으로 역시 윗분에게 우리도 숙직을 하겠다고 청했다. 이내 편집국 한 모퉁이에 5, 6평의 숙직실을 마련해주었다. 우리는 당번을 짜서 하루에 3~5명씩 숙직을 했다. 여성들은 모여서 밤새도록 수다 떨면서 재미있게 지냈다. 숙직 때문에 불편하다는 소리는 없었다.
그리고 우리 여사원만이라도 철저한 여성 의식으로 무장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일과 후에 모여서 여성학 공부를 하기로 했다.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우선 여성학 교재를 가지고 돌아가면서 읽고 발표하는 식으로 했다.
내가 ‘한겨레’에서 일한 것 중 보람 있었던 일은 ‘위안부 문제’에 관한 사설을 2년 사이에 14편을 쓴 일이다. 정부에서 중앙청 철거 방침을 발표했을 때(1993년) 지인들과 함께 철거 반대 운동을 폈다. 중앙청 건물이 아무리 일제가 지은 것이지만 일제강점기 역사의 산 증거요, 건물로서도 훌륭한데 왜 국가의 재물을 헐어 없애나 해서 반대한 것이다.
그런데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대표인 이효재 선생과 위안부 피해자 발굴의 원조인 윤정옥 교수는 절대 철거 찬성이었다. 윤 교수를 만나 “중앙청을 살려놓고 그 안에 방을 두 개쯤 얻어 위안부 관련 전시를 하면 일본 사람들이 와서 자연스럽게 자기 조상의 만행을 보게 되지 않겠는가” 하고 설득을 하였더니 수긍하셨다. 그래서 내가 그동안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 경위와 전 세계의 반응을 종합한 기사를 써서 <여성신문>에 게재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철거 찬성 의사를 철회했다.
그동안 우리가 염원해왔던 모든 것들, 즉 자유·평등·민주주의, 그에 포함된 남녀평등과 빈부격차 해소는 물론 민족의 통일까지, ‘한겨레’는 이 모두를 실현하기 위한 무기다. 창간호에서 다짐했듯이 열과 성을 다해 이 신문을 지키고, 이 나라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야 내가 모든 것을 바친 ‘한겨레’ 탄생이 진정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한겨레’와 만나서 다행이다.
정리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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