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이의 발자취] 일본 역사연구자 미야타 세쓰코 선생을 기리며
2009년 11월 일본 지바현 마쓰도시의 자택에서 미야타 세쓰코 선생. 필자 제공
1959년 조선사연구회 창립 주도
재일사학자 강덕상의 학문적 동지
공로 인정받아 서송한일학술상 수상 총독부 모임 ‘우방협회’와 4년간 토론
800시간 녹음 릴테이프 418개 남겨
‘자료 왜곡될라’ 사료 남기기 공들여 대학 4학년 때인 1957년 졸업논문 주제를 3·1운동으로 호기롭게 정했다가 자료 부족으로 헤매던 그는 옛 총독부 고위 관리들의 모임인 ‘우방협회’란 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곳에서 정리되지 않은 채 방치돼 있던 자료의 보고와 마주쳤다. 총독부 식산국장 등을 지냈고 우방협회를 이끌던 호즈미 신로쿠로와의 만남이 또 하나의 분기점이 됐다. 호즈미는 젊은 여대생의 탐구심이 기특했는지 함께 자료를 정리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그래서 총독부의 서열 2위였던 정무총감을 비롯한 관계자들과 20대 젊은 연구자들의 정례 모임이 시작됐다. 미야타의 표현을 빌리면 세대가 다르고 상반된 입장의 참여자가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는 ‘오월동주’의 세미나가 1958년부터 4년간 이어졌다. 논쟁 과정에서 논문의 주제를 하나씩 찾아낸 미야타는 자신이 쓴 글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원사료로 모든 논문을 처음 썼고 스스로 했다는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앞으로 다른 자료들이 나와도 자신의 논문이 기본적으로는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야타가 말년에 가장 공들인 것은 사료 남기기이다. 옛 총독부 고위직들과의 토론은 모두 녹음돼 대형 릴테이프 418개로 남았다. 약 800시간의 엄청난 분량이다. 그는 이 테이프의 행방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 ‘역사 수정주의자들’이 녹음 내용을 왜곡해 식민지지배를 합리화하는 데 활용할 것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그는 2009년 말 인터뷰에서 “이제 남은 시간이 없으니 논문 쓰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료집을 내는 것이 선결 과제”라고 밝혔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는 사람 중에 이 자료를 능숙하게 활용할 연구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으니 그들을 위해 환경정비를 해야 한다”는 말에 나는 전율을 느꼈다.
2011년 2월 서송한일학술상을 받기 위해 방한했을 때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를 방문한 미야타(오른쪽) 선생과 필자.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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