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전남 진도에서 굿 구경은 일상이었다. 밤이 늦어도 굿을 봤다. “아이들은 가라”고 어른들이 쫓아내도 관객석을 지켰다. 상여가 지나갈 때 상엿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뭉클했다. 어른들이 소리를 하며 놀면,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멈춰 서 들었다. 하지만 한동안 굿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멀리서 들리던 진도 북놀이 장단이 유년의 기억을 한순간에 끌어왔다. 묵직하게 가슴을 울리는 ‘저것’을 배우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소리꾼 하미순씨(가운데)가 스승 송순단 무녀(맨 왼쪽)와 씻김굿 가운데 길닦음 거리를 연행하고 있다. 하미순씨 제공
국가무형문화재 진도씻김굿 이수자 하미순(47) 박사는 굿보다 소리를 먼저 배웠다. 고교를 졸업한 뒤 진도의 한 학교 행정실 직원이었던 그는 “여성은 북보다 소리를 먼저 배워야지”라는 권유를 듣고 판소리 교습소를 찾아갔다. 첫 선생은 이임례(광주시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명창이었다. 섬진강 서쪽 보성을 중심으로 전승돼 온 서편제 보성소리 ‘심청가’부터 배웠다. 하씨는 “소리를 접한 뒤 체계적인 음악으로써 판소리 공부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송순단 무녀(가운데)와 함께 하미순씨(맨오른쪽)가 진도 씻김굿 공연을 하고 있다. 하미순씨 제공
하씨는 2000년 전남대 예술대학 국악과에 입학했다. ‘늦깎이’ 대학생이 된 그는 대학에선 보성소리 ‘심청가’와 ‘춘향가’ 등을 공부했다. 4학년 1학기 때 조기졸업할 정도로 국악 이론 학습 등 학업에 열중했다. 2003년 6월 대학 졸업 후 진도군립민속예술단 단원이 된 그는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진도향토문화회관에서 펼치는 ‘토요민속 공연’에 단원으로 참여했다. 강강술래, 남도들노래, 씻김굿, 판소리 등 진도사람들의 삶과 문화가 응축된 무대였다. “듣거나 보는 것은 좋아했지만, 남 앞에 서는 스타일이 아니었던” 그에겐 놀라운 변신이었다.
소리꾼과 무녀로 활동하고 있는 하미순 박사. 하미순씨 제공
무대에 서면서도 공부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았다. 전남대 음대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입학한 하씨는 2009년 ‘판소리 발림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자신이 무대에 섰던 경험을 토대로 소리꾼이 사설 내용에 따라 손이나 발로 감정을 표현하는 몸짓에 대해 연구한 논문이다.
국악 공부·공연할수록 굿에 끌려
15년 전 굿판의 무녀 되기로 결심
송가인 어머니 송순단씨가 굿 선생
굿 배우며 민속학으로 전공 전환
전라도 제석굿 논문으로 박사학위
최근 문화재 진도씻김굿 이수자 돼
“민속문화 원형 지키고 보존에 매진”
하씨는 ‘심청가’ ‘춘향가’ ‘흥보가’ 등 판소리 세 바탕을 완창할 정도로 소리 공부에도 매진했다. 그런데 국악을 공부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굿에 끌렸다. 그는 진도군립민속예술단에서 ‘길닦음’을 토막거리로 배워 무대에 서기도 했다. “진도에서 씻김굿은 유년시절부터 늘 보던 것이라 귀하다는 것을 몰랐어요. 국악을 공부하면서 ‘이렇게 좋은 음악이 내 옆에 있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소리꾼 하미순씨가 2020년 동편제 ‘흥보가’ 완창 발표회를 하고 있다. 하미순씨 제공
그래서 굿판의 무녀가 되기로 했다. 굿 선생은 가수 송가인의 어머니 송순단씨다. 하씨는 진도군립민속예술단 객원이었던 송씨가 씻김굿을 공연을 올릴 때마다 옆에서 지켜보며 굿에 매료됐다. 신을 받아 점을 치던 강신무였던 송씨는 진도 씻김굿을 배워 굿판에 섰다. 무속을 천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세습무계 예술인만으론 씻김굿의 전승이 끊길 위기에 처했을 때였다.
진도 씻김굿은 “단아한 춤사위와 아름다운 소리를 담은 음악 등 예술성이 높다”는 평을 듣는다. 하씨는 “강신무가 굿을 하는 남한강 이북 지역과 달리 전라도 등 남한강 이남에선 세습무계에서 굿 전통을 이어왔다”며 “하지만 세습무계만의 굿 전승이 어려워지면서 무계가 아닌 젊은 예술인들이 굿을 배우는 것이 전국적인 현상이 됐다”고 말했다.
하미순씨가 진도군의 토요민속공연에서 소리 공연을 펼치고 있다. 하미순씨 제공
하씨는 15년 전께 사람들의 의뢰를 받아 굿을 하는 송씨의 잔심부름부터 시작했다. 송씨는 국가 문화재 진도씻김굿 전승교육사(조교) 5명 중 1명이다. 2018년엔 ‘진도씻김굿보존회’에 들어간 하씨는 지난 4월 진도씻김굿 이수자가 됐다. 이젠 굿판에서 간단한 거리를 맡아 하는 보조무다. 하씨는 “망자의 가족들이 굿을 통해 한을 풀고 서로를 위로하는 모습을 볼 때 굿판에 선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진도씻김굿을 주재하는 송순단 무녀와 제자 하미순(오른쪽)씨가 망자의 넋을 씻기는 의례를 하고 있다. 하미순씨 제공
굿을 배우면서 그는 민속학으로 공부 방향을 전환했다. 2020년 ‘전라도 제석굿의 구성과 삽입가요 연구’라는 논문으로 목포대 대학원(국문학과 고전·민속문학 전공)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씨가 연구한 제석굿은 전라도 산 사람들의 복덕을 비는 굿거리로, 전라도 각 지역의 씻김굿에 빠지지 않고 들어 있는 의례다. 그래서 “예로부터 제석굿을 못 하면 ‘왕무당’ 소리를 못 들었고, ‘어금니가 안 났다’(아직 어리다)는 취급을 받았다”(이경엽 목포대 교수)고 할 정도로 제석굿은 씻김굿의 핵심적이고 비중이 큰 굿거리로 꼽힌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전남과 전북을 대표하는 큰 무당들의 사례를 통해 무속집단이 끌어들인 다양한 삽입가요가 제석굿에서 어떻게 발현해 다양한 무속적·음악적·연희적 역할과 특성을 나타냈는지를 연구한 것이다. 하씨는 “굿과 판소리 모두 소리와 음악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같지만, 발성이나 소리로 감정을 만드는 것은 다르다”며 “누군가 배우지 않으면 사라질 민속문화의 원형을 지키고 보존하는 일에 더욱 매진하겠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