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85살 생신날 촛불 동지들의 축하를 받으며 기뻐하던 고 김제현 동지. 천진한 표정에서 그의 한평생이 그대로 우러나와 볼수록 감동이 밀려온다는 필자는 이 사진 작품을 구입해 집에 걸어두고 있다. 사진 김이하 작가
2002년 ‘효순·미선 추모’ 첫 촛불
‘광우병’ 이어 ‘박근혜 탄핵’ 횃불
12월초 별세 때까지 ‘거리 손팻말’
“말 대신 실천으로 가르친 큰스승”
촛불시민 100여명 장례위원 자임
전남 장성 빈농집 장남으로 ‘무학’
다친 다리 절뚝이며 한평생 ‘노동’
지난 12월 3일 , 누군가 아흔살을 일기로 지상에서의 마지막 걸음을 멈추자 , 그를 기억하는 또다른 누군가들의 마음 속 발걸음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 가신이가 못 다 걸은 그 걸음을 내가 이어갈 수 있을까 . 아 , 나는 못할 것 같은데 . 나는 이제 그만 걷고 싶어 숨어 있었는데…, 십년 이십년 동안 , 본명이 있음에도 광장의 이름없는 ‘그 누군가 ’로 , 혹은 색종이 , 홍반장 , 소소 , 싸울아비 , 지구인 , 별꽃 , 빠숑 , 등등으로 불리우던 이들의 가슴 속에 슬픔과 그리움 , 망설임과 성찰이 어우러진 조사가 물결쳤다 . 백여명의 촛불시민들이 장례위원을 자임했고 고인의 관을 들었다 . 가신이의 한평생을 어깨에 메었다 . 내 마음 속 큰 어른이 가시었구나 ! 혈육보다 더 슬피 우는 이도 있었다 .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 )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 고인이 마지막 가시는 길에 ‘님을 위한 행진곡 ’이 울려퍼졌다 . 동지라고 불리우기 위해 자기 몫의 촛불을 꺼트리지 않으며 분투했던 아흔살 김제현 어르신 . 그는 사람들 가슴 속에 촛불의 길을 하나 내어주고 떠났다 . 상처투성이 ‘헬조선’ 한반도에 태어나 한번 역사적 사명을 깨달았으면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가야 한다고 . 그게 참삶의 길이라고 .
지난 12월3일 별세한 고 김제현 동지의 빈소인 서울 태릉 성심병원 장례식장 백합실에서 촛불 동지들의 추모제가 열렸다. 사진 촛불행동 제공
고 김제현 촛불 동지 추모제에서 장례위원들이 ‘님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고 있다. 사진 촛불행동 제공
◇ “나를 동지라고 불러주오”
그는 사람들에게 동지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였다 . 촛불광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그를 ‘봉화산 어르신’이라고 불렀다 . 누군가는 큰형님이나 선배님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아버지 같은 존재라고 했다 . 영감님 , 할아버지 ,로 친근히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 그러나 그 흔한 호칭인 ‘선생님 ’으로 부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 그 호칭은 한평생 힘든 노동자의 삶으로 점철되어 온 그분의 삶과 거리가 먼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 그를 보내며 , 사람들은 비로소 깨달았다 . 그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한보따리 남겨놓은 고인의 일기나 시를 접하는 동안 , 그는 말 대신 몸으로 가르쳐주는 큰스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민중의 싸움과 상처가 있는 곳이라면 한반도 반쪽 어디든 절뚝걸음으로 달려가 함께 비를 맞던 그는 진정 큰어른이셨다 . 이런 크나큰 분이 내게 , 우리에게 , ‘동지라 불러주오 !’ 하며 진정한 동지가 되는 길을 열어보여주었다 . 내게 ‘동지 ’라는 말은 익숙하면서도 두려운 낱말이다 . 침략과 전쟁 없이 평화롭고 자유롭게 서로 도우며 사는 세상 . 착취와 수탈없이 서로가 평등하게 사람으로 존중하며 상대의 삶과 정신의 발전에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는 관계 . 동지라는 말은 이런 공통의 지향 속에서 한 길을 걸으며 끝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어야 진정 동지인 것이기에 , 용기없는 나는 감히 그분을 동지라 칭하지 못할 듯하다 .
2016년 광화문 광장에서 ‘박근혜 탄핵’ 촛불시위 때 손팻말을 들고 있는 고 김제현 동지. 사진 김이하 작가 제공
◇ 광장의 빨치산 , 김제현
그가 처음 광장으로 나와 촛불을 치켜올릴 때 놀랍게도 그의 나이는 일흔살이었다 . 2002년 유월 , 꽃 같은 나이인 미선이 효순이가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그 사건은 그의 삶에 큰 획을 긋는다 . 한 집안의 종손으로서 가장의 책무에 충실하던 그의 삶은 비로소 역사적 무대로 옮겨오게 되었던 것이다 . 이후 2008년 이명박 정권 때의 촛불시위와 2016년 박근혜 탄핵을 위한 촛불투쟁에도 그는 열정과 신념으로 함께 했다 .
1934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그가 겪어왔던 한평생은 그야말로 이 땅 수많은 민중들의 전형이기도 했다 . 해방된 조선은 다시 미군정과 친일분자들에게 휘둘렸고 전국 곳곳에서 민중들의 피끓는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 그 엄혹한 세월 속에서 청춘기를 거쳐온 그는 결혼도 늦어져 스물아홉 살에나 했다. 가난한 집안이라 평생 정규 제도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그는 농사일과 건설 노동일로 잔뼈가 굵어 갔다. ‘하스리’(콘크리트 쪼아내기) 작업, 지
하철 선로작업, 외벽 밧줄에 매달려 일하는 위험한 작업을 하고 , 고물수집이나 버스 세차 등을 하며 가족을 건사했다.
2014년 7월 ‘세월호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위한 천만인 서명 운동’에 동참해 ‘별들과의 동행-도보순례'를 하고 있는 고 김제현 동지. 82살 때로 가장 고령이었지만 선두에 서서 끝까지 함께 했다. 사진 송하규씨 제공
조중동 신문 폐간을 위한 실천단 회원들이 지난 여름 광화문 광장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김제현 동지를 응원하고 있다. 사진 정영철씨 제공
그런 그에게 광장은 학습의 장이었고 실천의 단련장이었다 . 미국산 광우병 소고기 반대의 촛불 때 광장은 온갖 정치적 이슈들이 만개한 축제의 장이었다 . 4대강 반대 , 조·중·동 폐간 , 언론·방송 민주화 , 공공부분 민영화 반대 , 비정규직 철폐 등등, 구호는 소수만의 구호가 아닌 , 김제현 자신의 구호이자 전체 민중의 삶과 직결된 것임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 희망버스가 달리는 한진중공업으로 , 쌍용차 투쟁이 벌어지던 평택으로 , 세월호 유족들이 울부짖던 팽목항으로 , 어디든 그는 달려갔다 . 젊은 날 소에 받혀 한쪽 다리가 몇센티 짧지만 그 불편한 다리가 핑계가 되지 않았다 . 여든살이 넘어서도 그는 ‘제주 강정 평화’를 위한 대행진에 함께 하고 미디어 악법 철폐와 언론노조 민주화를 위한 단식농성에도 함께 하였다 . 박근혜가 탄핵 당하던 광장에서는 촛불투쟁이 성에 안차 횃불을 높이 쳐들기도 했다 . 나날이 젊어지는 나라 ! 그의 간절한 열망이었다 .
“여름비 , 우리가 촛불일꾼으로 활약할 대통령을 잘못 뽑았네 그려 ! 이제 더 옹골차게 가열찬 싸움을 벌여나가야 할 때네 .” 언젠가 들려주던 그의 말씀이 귀에 생생하다 .
촛불항쟁으로 대통령이 탄핵됐지만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은 빠르게 무기력해지고 보수화되어 갔다 . 민중을 위한 새로운 정치와 살기 좋은 나라를 기대하던 민중들은 점점 힘이 빠져갔지만 그는 끝까지 광장을 지켰다 .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광화문 광장 그 자리에 앉아 있던 그 . 차들이 빵빵거리는 그 거리 한복판에서 국가보안법 폐지와 사드 반대와 평화통일을 외치며 조용히 손팻말을 들던 그를 떠올린다 . 가슴이 뭉클 , 눈시울 붉어진다 . 1년 2년 3년 4년 5년 .... 20년… ! 차디찬 거리에서 촛불을 꺼트리지 않으며 노령의 그가 만들고 싶던 나라는 민중의 나라였다 . 그는 구순을 바라보는 때에도 여전히 거리의 전사였다 . 그는 술 담배도 하지 않고 늘 소식을 하며 자기 관리를 하였다 . 동지라고 불러주길 바라던 만큼 실천적인 동지가 되기 위해 건강관리도 철두철미하게 하였다 . 평생 냉수욕을 하며 다져진 몸이라 웬만해선 감기도 안 걸린다고 말하던 그는 몸져 눕기 몇 달 전까지도 찬물에 담근 수건으로 냉수마찰을 했다 .
지난 2018년 광화문 광장에서 1453일째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고 김제현 선생. 사진 정영철씨 제공
그는 누구에게나 묻고 대답을 구하는 겸손한 선생이었다. 대화 속에서 생각을 정리하며 실천으로 연결을 시켰다. 그의 실천과 사유는 광장에서, 민중의 진보적 전진 속에서, 알알이 익어갔다. 틈만 나면 그는 실천 속에 다져진 사유를 무수한 일기형식의 글로 정리해갔다. 자기 생의 의미와 사명감을 깨달으며 가슴으로 써낸 ‘역사적 사명’, ‘민중이여’, ‘노동해방’, ‘자유와 평등’ 같은 소박한 글들은 그가 얼마나 가슴 뜨겁게 실천과 구호를 일치시켜 갔는지 잘 드러내 준다. 때 묻은 이면지에 서투른 글씨로 똑같은 글들을 몇 장씩 써내던 그. 그의 생각과 실천이 확장될 때마다 몇 문장씩 첨가되곤 했다. 남도 가락과 아리랑 장단이 출렁이는 그의 글들에는 실천가 김제현이 올올하다. 그의 신념, 그의 사랑, 그의 그리움…, 아쉽게도 지면상 다 소개는 못하기에 훗날 책으로 만나볼 날을 고대한다.
일흔 살에 광장에 처음 나와 민중으로서 자기 존재의 역사적 사명을 깨달은 이래 구순이 되도록, 그는 마지막까지 자기 몫의 촛불을 치켜들었다. 도시 광장의 빨치산이던 그의 아름답고 치열한 삶 앞에 고개 숙이며 그를 불러본다.
‘늬가 있어 내가 있고, 내가 있어 늬가 있다’고 말하시던 김제현 동지여, 당신은 영원한 청년 촛불입니다. 그토록 사랑하고 염원했던 이 겨레의 자주통일과 평등세상을 위해 하늘나라 그곳에서도 지켜보실 테지요. 아름다운 동지여, 참으로 고맙습니다.
박여름비 / 헬조선 변혁을 열망하는 르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