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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궂긴소식

“냉전·독재 맞서 일궈놓은 ‘노동운동의 오늘’ 역사가 기억할걸세”

등록 2022-10-26 19:51수정 2022-10-27 02:33

[가신이의 발자취] 고 김금수 한국노동연구소 명예이사장을 보내며
2005년 5월 한 행사에 나란히 참석한 ‘암장’의 선배 박중기(왼쪽) 선생과 후배 고 김금수(오른쪽) 명예이사장. <한겨레> 자료사진
2005년 5월 한 행사에 나란히 참석한 ‘암장’의 선배 박중기(왼쪽) 선생과 후배 고 김금수(오른쪽) 명예이사장. <한겨레> 자료사진
어쩌라고 앞서가는가 . 그대 ! 민주와 통일은 어쩌고 그냥 가는가 . 나더러 묘지의 잡풀이나 뜯고 있으란 말인가 . 동야 ( 東野 ) 김금수 , 평생을 같이했는데 , 이제 곁에 머물지 않는다니 이 일을 어찌할꼬 .

우리가 만난 게 일흔 해도 훨씬 더 지났네 . 1951 년 , 낙동강 물이 핏빛으로 물들던 때 , 뚝방마다 거리마다 피난민의 울부짖음이 하늘을 찌를 때 우린 총총한 눈빛으로 만났지 . 자넨 까까머리 중학생이었고 , 두 살 위인 난 고등학생이었어 . 해방 후에 이래저래 시끄럽더니 , 전란으로 갈라진 나라는 종잡을 수 없었지. 옳고 그름을 살필 줄 아는 똑똑이가 되자 ! 그런 뜻으로 까까머리 중고등학생들이 서클을 꾸리고 , 이름을 ‘암장’ ( 巖獎 ) 으로 지었어 . 함께 책을 읽고 , 방이 있는 친구집에서 밤새워 토론할 때 선한 얼굴 , 초롱한 눈빛의 자네를 기억하네 .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았던 삼민주의 , 사회주의 , 민족주의 등을 함께 공부했고 전쟁 없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함께 일하자는 결의도 했어 . 조금만 다른 얘기에 관심을 보여도 , “ 너 골로 갈래 ?” 소리를 듣던 때였지 . 그야말로 골짜기로 끌려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생명을 앗아가던 세태에 주눅 들지 않던 의기 ( 義氣 ) 라고 하지 않을 수 없지 .

우린 앞서거니 뒤서거니 각자 학교 , 직장 등으로 헤어졌어 . 그렇지만 방학이 되면 각자 토론 과제물을 가지고 모여 밤새 토론하곤 했지 .

이승만 정부의 부패 , 무능 , 치졸한 정략에 염증을 내던 우리에게 희망의 시절이 열렸어 . 청춘의 날에 4·19 를 맞은 거야 . 토론이 가능한 나라가 된 거지 . 그때 부산에서 경험을 살려 평화통일의 꿈을 조직으로 엮어가던 자네를 기억하네 . 민족민주청년동맹 중앙맹부 간사장을 맡았고 , 각 지역 조직들의 전국 연합단체인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실무 책임자로 일하던 자네는 불철주야 사람들을 모으고 , 평화통일의 꿈을 조직했지 . 희망찬 날들이었어 .

헌정질서를 유린한 군인들의 쿠데타로 우리의 꿈은 꺾였어 . 그리고 소위 ‘ 인혁당 사건 ’ 에 휩쓸리게 되지 . 혁신운동을 백안시하던 정보당국이 우리를 싹쓸이하듯 끌고 가 조직으로 엮었어 . ‘ 이적단체 인민혁명당 ’ 을 만들었다고 . 함께 술 마시고 , 시국을 걱정하는 토론이 다 공작행위가 된 거야 . 얼마간 형무소 징역을 살게 되었으니 기가 막힐 일이지만 , 더 힘든 건 출소 후에 취업이나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것이었어 . 기관원이 따라다니고 , 온갖 곳에 불순분자라고 떠벌리고 다니니 생활이 될 리가 없지 . 그 시절 남대문 시장에서 새벽 꽃 도매상을 하면서 생활을 지탱하던 자네를 기억하네 . 그런 시절에도 의연했고 여유를 잃지 않았어 . 그 뒤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한국노총 기획실에서 일하게 되었지 . 노동운동의 기초부터 전망까지 살필 수 있는 자네 평생의 일을 시작하게 된 거야 .

1975 년 4 월 , 그날을 어찌 잊으리 . 한 해 전 ‘2 차 인혁당 사건 ’ 으로 우린 줄줄이 엮여 중앙정보부로 끌려갔어 . 제도권 조직의 실무를 맡아 일하던 자네는 엮을 혐의가 없어 참고인 조사로 끝났지만 , 도예종 , 이수병 , 여정남 등 여러 동지가 허무맹랑한 죄목으로 구속되었고 몇몇은 사형까지 선고받았어 . 설마 집행까지 하랴 했지 . 그런데 이 무슨 날벼락인가 . 미친 박정희 정권은 기어이 아홉 명의 목숨을 빼앗는 사형을 집행했어 . 그렇게 스러진 동갑내기 단짝 이수병을 기억하며 자네는 자주 눈물짓곤 했지 . 둘이 같이 있을 때 얼마나 보기 좋았던지 , 지켜보는 내가 흐뭇했는데 , 먼저 가서 보려고 이리 서둘러 가시나 .

2013년 11월 5일 박중기 선생의 산문집 ‘헌쇠 80년’ 출간기념회 때 기념사진. 왼쪽부터 김형태 변호사, 고 성대경 친일진상규명위원,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남상헌 민주노총 지도위원, 김정남 전 청와대 문화수석, 박중기 선생, 고 김금수 명예이사장, 고 김달수 4월혁명회 회원, 고 김낙중 민중당 대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다.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제공
2013년 11월 5일 박중기 선생의 산문집 ‘헌쇠 80년’ 출간기념회 때 기념사진. 왼쪽부터 김형태 변호사, 고 성대경 친일진상규명위원,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남상헌 민주노총 지도위원, 김정남 전 청와대 문화수석, 박중기 선생, 고 김금수 명예이사장, 고 김달수 4월혁명회 회원, 고 김낙중 민중당 대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이다.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제공
한국노총에서 10 여 년 , 그리고 새롭게 자주적인 노동운동을 세우자며 뛰어다니기를 또 몇 해 , 민주노동운동의 이론가로 , 학습자로 , 기둥으로 선 자네가 항상 믿음직하고 자랑스러웠네 , 민주노총의 산파였고 , 산별노조 , 진보정당의 디딤돌이었어 . 자네와 함께하고 , 또 자네를 따르던 후학들이 증언하는 것처럼 우리 역사에 자네의 족적이 뚜렷하네 . 자네 아니었다면 , 이만큼 우리 사회가 일어설 수 있었을까 .

뒤늦게 인연 맺은 정희씨와 함께 있는 장면이 얼마나 아름다웠는데 이리 빨리 떠나시나 . 아들 , 딸 , 손자 저렇게 어엿한데 그 손길 접기가 그리 쉬운 일이던가 .

자네가 세우고 다듬어 온 한국노동사회연구소는 후배들이 잘 챙겨갈 거야 . 세계노동운동연구회도 잘 끌어 갈거네 . 엊그제까지 심혈을 기울였던 항일노동운동가 이재유 기념사업은 후학들이 어련히 세우고 넓혀갈 것이네 .

사귀어온 지난 칠십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자네가 얼굴 찡그리는 걸 본 적이 없어 . 험난한 시대를 살며 세상에 해를 끼쳐본 적이 없이 산 사람이 동야 김금수 , 당신이야 . 이렇듯 아름다운 벗 언제 다시 만나지려는고 .

명복을 비네 . 비록 오늘 후퇴가 있다 하더라도 다시 앞으로 나아갈 이 나라를 부디 흐뭇하게 지켜보시게 .

박중기/민족민주열사희생자 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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