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이의 발자취] 고 정태인 전 청와대 비서관을 보내며
고 정태인(오른쪽) 비서관과 필자 이상헌(왼쪽) 국장이 2017년께 서울의 한 카페에서 함께한 모습이다. 이상헌 국장 제공
학위보다는 ‘사회경제이슈’ 중심에
뒷계산없이 돕고 늘 배우고 나누고
나라살림 감시는 날카로웠으나
제집 살림 북돋는 일에는 ‘젬병’
“비정규직 삶 많이 힘들었다” 토로 가을볕이 참 붉다고 했는데, 어느새 안개가 몰려오고 해가 졌다. 지난 21일 아쉬운 듯 뒤돌아보며 내려앉는 해거름 뒤로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정태인. 두어 주 전인가. 그는 “아직 살아 있어요”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남겼다. 그렇게 한번 피식 한번 웃고, 먼 길을 서둘러 갔다. 그는 바람같은 사내였다. 엄혹했던 대학 시절에 그의 이름과 존재는 내놓고 말하지 못하는 수군거림의 대상이었고, 세상에 날것의 민주주의가 찾아왔을 때 그는 마치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여기저기 논에 물꼬를 내는 농부처럼 쉬지 않고 뛰어다녔다. 물을 이끌려고 했으나, 때로는 물에 쓸려가기도 했다. 그가 손을 내밀고 이끌며 만난 인연들이 넘쳐 봄날 고랑처럼 조잘대었지만, 물꼬를 어디에 낼 것인가를 두고 다퉜던 이들은 그를 힘겹게 기억한다. 바람이 장대비를 어찌 이길 것인가. 이 모든 고단함 끝에, 그는 훌쩍 떠났다. 비는 아직도 바깥에 쏟아지는데. 1980년대 후반 경찰에 쫓길 때도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상황분석을 했던 그는 서울대 경제학과 박사과정으로 들어갔다. 박사학위를 발판삼아 교수가 될 생각은 하지 않고, 잡지에 쓰고 방송에서 소리 내면서 늘 사회경제적 이슈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단단한 얼굴에 목소리는 여물었고 논지는 짜릿할 만큼 명료했다. 그는 ‘진보’란 보란 듯이 깃발을 꽂아두고 외쳐대는 것이라 믿지 않았다. 내일의 세상은 하루만큼 변하고 또 변하는 것이라면, 진보란 사람들과 함께 천조각을 얼기설기 묶어가는 일이어야 했다. 논쟁하고 싸울 일 투성이었다. 오늘 어깨를 나누었다가도 내일은 날 선 말을 주고받는 일도 많았고, 그런 만큼 담배 연기에 잠기고 술에 허물어지는 날도 많았다. 술잔 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때면 그는 노래방을 가자고 했다. 그 야물딱진 목소리를 가지고도 노래를 지독하게 못 했지만, 그의 ‘행위예술’은 대단했다. 그때, 정태인은 저 가을바람처럼 자유로웠다. 그가 했던 일은 많고도 많았다. 2002년부터 노무현 정부 경제정책을 도왔지만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을 반대하면서 한때 뜻을 같이했던 사람들과 소원해졌다. 무역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특정산업이나 계층에게만 유리한 무역형태를 반대했다. 무역뿐만 아니라 경제 전반에 일관되게 적용되는 그의 원칙이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너나없이 하는 얘기다. 그 이후 그는 진보계열 정당 일을 힘써 도왔다. 늘 그랬듯이 배우고 나누는 일에 소홀함은 없었다. 연구소 소장직을 여러 군데서 하고, 부르는 곳이 있으면 쫓아가 강연했다. 정치인도 ‘저 사람이다’하면 일단 무조건 도왔다. 세세한 뒷계산을 앞세운 적이 없었고, 그 때문에 쓸쓸한 일이 적지 않았다. 최근에는 북한과 환경 문제에 집중했다. 이 역시 치열했다. 병세가 악화하자, “환경을 위한 연대”를 유언처럼 남겼다.
2021년 여름 폐암 말기 진단 직후였던 고 정태인(오른쪽) 비서관의 자택에서 서울을 방문한 이상헌·옥혜숙(왼쪽) 부부가 함께한 모습이다. 이상헌 국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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