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6월 김근태 의장 석방 때 공개·비공개 민청련 간부들이 모두 함께한 사진이다. 앞줄 왼쪽 둘째부터 김 의장과 최민화·이을호 부의장, 모두 고인이 됐다. 민청련동지회 제공
20대 초부터 얼추 세상을 보는 눈을 함께한 이후 이제껏 친구이자 동지로 지내온 ‘최민화’가 황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 기이하다, 그가 생명줄을 놓은 날이 10월 17일인 것이.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72년 10월 17일, 독재자 박정희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국회와 정당을 해산시키는 한편, 민주주의와 시민의 권리를 대폭 제약하는 이른바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포했다.
그 날, 중간고사가 끝나 우리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찍부터 청진동 평양집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는데, 어둑어둑할 무렵 육중한 탱크의 캐터필러 소리와 함께 특호 활자로 인쇄된 ‘특별선언’ 호외가 광화문 네거리에 흩뿌려지고 있었다. 경악, 분노, 절망을 안주 삼아 통음을 했던 그 날의 막걸리판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이제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민화와 내가 지금까지 친구로, 동지로 굳건하게 지내왔던 것은 50년 전 바로 그 날의 분노와 절망이 원천이었다. 분노는 저항을 낳고, 절망은 희망을 꿈꾸게 한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을 때 전국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 대한 독재 권력의 투옥과 협박에도, 우리가 당당했던 것은 시민적 저항의 힘으로 민주화의 희망을 만들자는 꿈 덕분이었다.
민화는 군사정권의 폭압에 맞선 싸움이라면 언제든 함께했다. 1969년 연세대 신입생 시절부터 박정희의 3선 개헌 반대 투쟁에 나섰고, 민청학련 사건으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을 살았다. 전두환과의 인연도 지긋지긋하여 1979년 11월에는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의 고문 수사로 반죽음에까지 이르렀다. 1985년에는 김근태 의장과 민청련을 조직했다가 또다시 구속당했다. 그의 황망한 죽음이 고단했던 그 시절 그 노정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징역살이 연대기’만으로 어찌 최민화를 온전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 1970·80년대 서울 화곡동 고은 시인의 집은 민주화와 민족문화에 대한 청년들의 열띤 토론장이었고, 반독재 운동의 산실이었으며, 가끔은 민주인사의 연행과 구속에 항의하는 농성장이었다. 어느 날 고은 시인이 가만히 민화를 관찰하고는 시 한 편을 내놓았으니, 이 시만큼 최민화의 사람됨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언설은 없을 듯하다. 민화가 떠난 빈자리를 시 한 편으로 채우기에는 너무도 허망하나, 회자정리라 하니 울음을 삼키며 민화를 떠나보낸다.
‘지붕 위 박 몇 덩이
실컷 익어
밤 중에도 하얀 박 몇 덩이
그렇게 넉넉한 사람
최민화
핏대 세워 토론하는 화곡동 어느 집에서
그는 넉넉하게 입 다물었다가
너털웃음으로
동지들의 불화를 풀어주었다.
그 밑창의 고통 따위 숨기고
허허허
예수를 믿는지 안 믿는지
아무런 흔적 없이
예수 믿어
이런 사람도 있다.
이를테면 용문산 용문사
천년의 은행나무 뿌리 불거져 나온
그런 세월인 양.
(고은 <만인보> 1163 ‘최민화’, 창비)
김학민/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 전 경기문화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