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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의 한국사 겪어낸 ‘임정의 아들이자 마지막 증언자’ 잠들다

등록 2022-08-23 21:11수정 2022-08-24 02:33

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 별세
23일 별세한 고 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의 서울아산병원 빈소. 임정기념사업회 제공
23일 별세한 고 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의 서울아산병원 빈소. 임정기념사업회 제공
1928년 중국 상하이 ‘임정’ 본부 출생
망명한 대동단 총재 김가진 선생 손자
“이시영 할아버지·김구 아저씨 불러”
1946년 환국·미군 통역관·기자 활동
‘민족일보’ 때 사장 조용수 사형에 충격

‘백범의 품 안에서 자란 임시정부의 아들’이자 ‘임시정부의 마지막 증언자’로 평생토록 헌신한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이 23일 오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

고인은 1928년 10월 중국 상하이에서 임정 본부가 있던 프랑스 조계 안의 한인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동농 김가진 선생은 대한제국 시절 김홍집내각에서 ‘홍범 14조’를 직접 기초한 개화파 관료이자 3·1운동 직후 비밀결사 조선독립대동단을 조직한 총재로서 일제의 감시를 받자 일흔넷의 고령으로 상하이로 망명해 임정의 고문을 지냈다. 아버지 성엄 김의한은 임정의 실무요원이자 김구 선생의 비서로 일했고, 어머니 수당 정정화는 임정의 살림부터 독립운동 자금 모금까지 헌신해 ‘임정의 잔 다르크’로 불리었다.

2013년 8월 <조국으로 가는 길> 특별전시회 때, 1928년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김구(왼쪽) 선생이 김자동(아기) 회장을 안아주는 동안 모친 정정화(오른쪽)가 밥을 짓는 장면을 미니어처로 재현해놓았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2013년 8월 <조국으로 가는 길> 특별전시회 때, 1928년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김구(왼쪽) 선생이 김자동(아기) 회장을 안아주는 동안 모친 정정화(오른쪽)가 밥을 짓는 장면을 미니어처로 재현해놓았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석오 이동녕·성재 이시영 선생을 할아버지, 김구·조소앙·엄항섭 선생 등 임정요인들을 아저씨’로 기억하는 그는 1930년대 상하이·자싱·난징·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충칭 등으로 이어진 임시정부 이동경로를 따라 성장했다. 1939년 류저우에서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 대원으로 항일전 상이군인 위문공연을 하며 광복군들과 어울려 지냈던 그는 1940년대 충칭에 정착해 고급중학교 과정을 마쳤다. 1946년 5월 부모와 함께 피란민 귀국선을 타고 서울로 환국한 그는 보성중학교(6년제)를 거쳐 서울대 법대 재학중 한국전쟁이 터져 학업을 중단하고 입대해 수년간 주한 미군의 통역관으로 일했다. 1954년 <조선일보> 기자로 언론에 입문한 그는 얄타회담 전문을 실은 <뉴욕타임스> 기사를 특종 보도하기도 했고, <동양통신> 외신기자를 거쳐 60년 4월혁명 직후 창간된 <민족일보>로 옮겼다. 5·16 쿠데타 군부의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사형 사건’에 충격을 받아 언론계를 떠난 그는 1997년 ‘민족일보 사건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조용수 사장의 명예회복을 끌어내기도 했다.

그는 1966년 베트남의 호찌민을 거쳐 1968년 중국 칭다오에서 방직기계 공장을 하는 등 2003년까지 여러 업체를 설립해 중국의 28개 성과 5개 자치구를 비롯 세계 100개 나라를 방문할 정도로 성공적인 경영자의 길을 걸었다.

고인은 1980년대 후반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크루프스카야의 <레닌의 회상>, 한수인의 <모택동 전기> 등을 번역해 국내에 처음 소개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 법통이 기술된 것을 계기로 임시정부 계승운동에 나선 그는 2004년 사단법인 임정기념사업회를 창립하고 지금껏 회장으로 활동해왔다.

뒷줄 오른쪽부터 시계반대방향으로 고인의 조부 동농 김가진, 1935년 중국 난징 시절의 선친 김의한·모친 정정화·7살 김자동 가족.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뒷줄 오른쪽부터 시계반대방향으로 고인의 조부 동농 김가진, 1935년 중국 난징 시절의 선친 김의한·모친 정정화·7살 김자동 가족.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환국 이듬해인 1947년 찍은 첫 가족 사진이자 한국전쟁 때 납북된 부친과 함께한 유일한 사진이다. 왼쪽부터 모친 정정화, 보성중학교 5학년생 김자동, 부친 김의한. 임정기념사업회 제공
환국 이듬해인 1947년 찍은 첫 가족 사진이자 한국전쟁 때 납북된 부친과 함께한 유일한 사진이다. 왼쪽부터 모친 정정화, 보성중학교 5학년생 김자동, 부친 김의한. 임정기념사업회 제공
1960년대 후반부터 30여년 사업가로
2004년 ‘임정기념사업회’ 창립 주도
지난해 ‘임정기념관’ 건립 결실 이뤄
‘동농 선생 유해 봉환과 서훈’ 미제로

김 회장은 2005년부터 15년 동안 매년 한 차례씩 '독립정신 답사단'을 이끌고 중국을 비롯한 독립운동 유적지를 직접 답사해왔다. 2006년에는 재북임시정부요인 후손 추석성묘단을 이끌고 분단 이후 최초로 평양의 재북인사 묘역을 참배했다. 이때 한국전쟁 와중에 납북됐던 부친의 묘비를 통해 1964년 10월 사망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88년 <한겨레> 창간 주주로 참여해 한때 신문사 지국을 운영하기도 했던 그는 2010년 1월부터 <한겨레> ‘길을 찾아서’를 통해 ‘임정의 품 안에서’ 회고록을 연재했다. 그는 특히 이명박 정부가 2008년 5월 ‘대한민국 건국 60년 기념사업회’를 출범시키자 “3·1운동과 임정의 법통을 부인하고 대한민국의 역사를 30년이나 지워버리는 우를 범했다”고 개탄하며 ‘임정의 산증인’으로 나섰다. “국사 과목마저 없어질 지경으로 역사교육이 날로 소홀해지고 심지어 왜곡되고 있어 임정을 비롯한 선열들의 항일투쟁사와 민족의식을 보고 들은 대로나마 남겨둘 의무를 느끼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임시정부 28년간의 역사를 증언한 연재 내용을 바탕으로, 2012년 <상하이 일기>(두꺼비), 2014년 <임시정부의 품 안에서>(푸른역사)를 펴낸 데 이어 2018년에는 임정기념사업회 15년 활동까지 담아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푸른역사)를 출간했다. “임시정부는 내 삶의 뿌리였고, 살아가는 길의 좌표였다. 이 책은 내 안에 남은 임시정부의 기록이다.”

고 김자동(왼쪽) 회장은 부인 김숙정(오른쪽)씨과 함께 2006년 추석 때 평양 용궁동 재북인사 묘역을 방문해 부친 김의한 선생에게 46년 만에 참배를 했다. 1991년 작고한 모친 정정화 선생은 사진으로 함께했다. 임정기념사업회 제공
고 김자동(왼쪽) 회장은 부인 김숙정(오른쪽)씨과 함께 2006년 추석 때 평양 용궁동 재북인사 묘역을 방문해 부친 김의한 선생에게 46년 만에 참배를 했다. 1991년 작고한 모친 정정화 선생은 사진으로 함께했다. 임정기념사업회 제공

2017년 12월 중국을 국빈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김자동(앞줄 오른쪽 둘째) 회장 등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충칭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함께했다. 청와대 제공
2017년 12월 중국을 국빈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김자동(앞줄 오른쪽 둘째) 회장 등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충칭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함께했다. 청와대 제공
특히 고인은 말년까지 필생의 과업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에 혼신을 기울였다. 2006년부터 임정기념관 상임위원장을 맡아 2015년 임정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구성을 끌어낸 그는 문재인 촛불정부들어 착공식을 한 데 이어 2021년 11월 임시정부 환국 및 기념관 건립을 이뤄냈다. 이런 공로로 2020년 우당상, 2022년 3·1절 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상하이에 홀로 남아 있는 조부 동농 선생의 유해와 독립유공자 서훈 문제는 끝내 풀지 못해 ‘고인의 한’으로 남았다. 동농의 아들 부부를 비롯 방계 혈족까지 대동단원 대부분이 유공자로 인정받았지만, 보훈처는 지난 30년 동안 8차례나 신청한 서훈을 부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숙정(화가)씨와 딸 진현·선현(오토그룹 회장)·미현씨, 아들 준현씨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은 26일 오전 7시30분이다. (02)3010-2000.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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