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7월 초순 민주화운동의 전국연합조직 결성을 위해 원주 지역 대표자를 논의하고자 구룡사 계곡에서 만났을 때 모습이다. 그때 원주에서는 이창복 선생을 추천했다. 오른쪽부터 장일순 선생, 이부영 민중민주운동협의회 공동대표, 최열 공해추방운동연합 대표, 김지하 시인. 최열 대표 제공
김지하 시인이 떠났다. 함부로 입에 올리기를 삼가야 할 김지하가 떠났다. 내게 그의 추도사를 써달라고 요청이 오기까지 여러 곡절을 거쳤으리라. 써야할 사람이 사양하는 일들 말이다. 내게는 그 요청이 오면 거절할 수 없는 지엄한 이유가 있다. 그의 오늘이 있도록 만든 원인 제공자였기 때문이다.
1975 년 2월15일 인권탄압과 독재정치로 위기에 몰린 박정희 정권이 김지하를 비롯한 정치범 200여명을 석방했다. 무슨 배포로 대규모 은전을 베풀까, 의아했다. 그뒤 3월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주도해 중앙정보부의 광고탄압을 당하면서 국내외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동아일보>에 시대를 가름할 글이 실렸다. 김 시인의 장모이신 정릉 박경리 선생댁으로 찾아가,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그에게 지난 1년 감옥에서 겪은 일을 써보라고 권한 게 나였다. 그는 즉석에서 이야기하듯 글을 써주었고, <고행 1974> 제목으로 3 회에 걸쳐 연재했던 것이다.
김 시인은 옥중에서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사형수 하재완씨로부터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사건이 조작되었으며 창자가 터져 탈장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다”는 처절한 사연을 통방을 통해 직접 전해 들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면 그 사건 관련자들의 사주로 조직되었다는 ‘민청학련’도 마찬가지로 용공조작되었다는 뜻이었다. <고행 1974>의 고발은 그래서 시대를 가를 글이었다. 중앙정보부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김지하의 형집행정지를 즉각 취소하고 다시 투옥시켰다.
박정희 용공조작 격파한 ‘고행 1974’
원고청탁해 재수감 ‘원인 제공’ 인연
“해방·민주·생명평화 꿈꾼이들
가슴 응어리 풀고 명복 빌어주었으면”
고인의 장례식은 유족 뜻에 따라 4일간 가족장으로 진행한다. 11일 오전 9시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에서 발인해 화장을 거쳐 토지문화관 선영에 모신다. 문화예술인과 생명운동가 등은 49재 날인 6월25일 서울에서 ‘생명 평화 천지굿’으로 추모문화제를 열기로 했다. 토지문화재단 제공
1975년 3월에는 자유언론을 실천했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기자들이 폭력배들에게 폭행당하면서 거리로 쫓겨나고 해고당했다. 내가 지금 ‘동아투위’의 일원으로 자유언론실천재단의 이사장을 맡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뒤이어 1975년 4월9일 대법원 사형 확정판결을 받은 인혁당 재건위 피고인 8명에 대해 판결 18시간 만에 교수형이 집행됐다. 그해 4월1일부터 30일 사이에 남베트남은 공산화됐고 베트남전쟁은 종결됐다. 여의도 5·16 광장에서는 베트남 공산화를 규탄하고 민주화 요구를 억압하라는 100만인 반공궐기대회가 5월 내내 열렸다. 미국의 베트남 포기로 박정희가 되살아날 수 있었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격문’, ‘오적’, ‘비어’, ‘타는 목마름으로’ 등 반독재 민주화 열망을 온몸으로 드러낸 김지하의 전반기 서슬푸른 투쟁은 <고행 1974>로 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그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독재자와의 숨막히는 줄다리기가 계속되었다. 면회금지, 책안넣어주기, 서신집필금지, 온갖 용공조작으로 그의 6년 가까운 징역살이는 피를 말리는 싸움의 연속이었다. 그 한 사람을 가두기 위해 그의 감방 양쪽의 20여개를 모두 비우고 교도관을 2명씩 배치하여 서로 감시토록 했다.
하지만 전병용 교도관 등의 도움과 기지로 감옥 밖의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쓴 ‘김지하의 양심선언’은 1975년 7월 무사히 반출됐다. 이어 8월 일본에서 공표된 그의 양심선언은 반공법 올가미에 맞선 수많은 국내 민주화운동 세력의 지침서가 되었으며 국외 양심세력이 한국 민주주의를 응원하는 격문이 되었다 .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세번째 구속됐던 김지하 시인이 1975년 2월 15일 박정희 정권의 돌연한 ‘정치범 200명 석방 조처’로 풀려나 민주 인사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지하 시인은 1975년 3월 동아일보 기자였던 필자의 권유로 투옥수기 ‘고행-1974’(왼쪽 사진)를 연재했고, 이로인해 27일 만에 다시 수감되어 80년 12월에야 석방됐다. 재수감된 서울구치소에서 몰래 써서 반출한 ‘김지하 양심선언’(오른쪽)은 1975년 8월 일본 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를 통해 전세계에 공표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민주화운동 시절에는 투쟁을 벌이다가 사형 혹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전력이 있는 인사들은 또다시 전면에 나서지 않아도 묵인하는 불문율이 있었다. 그 불문율에 따라서 조용히 지내도 무방했을 김지하가 직진 돌파한 덕분에 박정희 정권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용공조작은 무력화됐다.
1975년 6월 나 역시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되면서 우리는 잠깐 ‘서울구치소 동기’가 되기도 했다. 낡은 감옥창틀 틈새로 풀씨가 날아와 싹이 돋았다. 밥을 창틀에 놓아주자 참새와 비둘기들이 때가 되면 찾아왔다. 길어지는 징역살이를 이어가는 동안 그는 자신의 전반 생애를 되돌아 보게 되었을 것이다.
1980년 그는 마침내 네번째 옥살이에서 풀려났지만 여전히 계속되는 군부독재, 분단으로 고통 당하는 남북의 주민들, 영·호남의 지역대립, 끈질긴 빈부격차 등을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핵전쟁 위기와 동서 진영 대립 속에서도 냉전을 녹이는 힘찬 역사의 흐름은 도도했다. 드디어 독일통일과 동유럽 체제전환, 소련방 해체는 김 시인의 철학적 영감을 채찍질했다. 기후변화와 생태파괴로 다가오는 절박한 인류의 위기까지 예감하면서 다시금 우리의 처지에 대해 고통스럽게 소리지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낡은 틀에 갇혀있는 현실에 다시 젊은 시절의 ‘직진 본능’이 되살아났다. 무엇보다 자기 몸처럼 아끼던 젊은이들이 분신하고 투신하여 목숨을 끊는 사태를 저지하지 않으면 ‘선배 노릇을 내던지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김지하와 함께 한반도의 해방과 민주, 생명평화를 꿈꿨던 분들은 부디 그의 명복을 빌어주시길 바란다. 가슴의 응어리가 있다면 푸시길 바란다. 떠나는 김 시인에게 그가 구성지게 부르던 노래 ‘부용산’ 을 들려주고 싶다.
‘부용산 오리길에 /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 솔밭 사이 사이로 / 회오리바람 타고 /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 너는 가고 말았구나 / 피어나지 못한 채 /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 부용산 봉우리엔 /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