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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궂긴소식

“한평생 무실역행 ‘노학연대 실천’ 고생 많이 하셨소”

등록 2021-12-16 22:24수정 2022-03-17 11:58

[가신이의 발자취] 고 이태복 형을 보내며
전두환의 5공화국 정권은 민주화운동의 새로운 양상인 ‘노-학 연대’를 막기 위해 81년 6월 이른바 ‘학림사건’으로 명명한 ‘전국민주노동자연맹’과 ‘전국민주학생연맹’ 사건을 동시에 터뜨렸다. 사진은 이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무기형을 살다가 88년 7월 특사로 풀려난 이태복 전 노동부 장관이 대전교도소 앞에서 어머니를 만나 기뻐하는 모습.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전두환의 5공화국 정권은 민주화운동의 새로운 양상인 ‘노-학 연대’를 막기 위해 81년 6월 이른바 ‘학림사건’으로 명명한 ‘전국민주노동자연맹’과 ‘전국민주학생연맹’ 사건을 동시에 터뜨렸다. 사진은 이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무기형을 살다가 88년 7월 특사로 풀려난 이태복 전 노동부 장관이 대전교도소 앞에서 어머니를 만나 기뻐하는 모습.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사람은 누구나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 그 궤적이 너무나 커서 역사에 엮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시대적 개념어를 남긴 사람은 그 시대를 풍미하였다 할 것이다. 지난 12월 3일 우리 곁을 떠난 이태복 형, 고인은 이 나라의 민주화과정에서 주요한 무기였던 ‘노학연대’라는 개념어를 창안하여 힘껏 실천하였던 사람이다.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의 결합을 이론적으로 완성했다는 뜻이다.

1970년대 말 유신체제가 극악한 탄압을 하던 그때 이에 맞선 학생운동은 폭발적으로 터져나왔다. 그 넘치는 젊음의 열정이 노동자들과 힘을 합쳐야 강고한 군부독재를 물리치고 민주화를 완성할 수 있다는 논의가 비로소 고인에 의해 노학연대라는 이론으로 정립되었던 것이다. 흥사단에서 만난 선후배 사이를 넘어서, 고인을 창의적이고 역동적인 이론의 창안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지점이다. 또한 고인은 노동자에 대한 지식인의 편견을 벗어나고자 현장노동도 열심히 실천했다.

1979년 10월26일 유신독재자 박정희가 피살당하던 날, 나는 일산에서 친구의 농사를 도와 벼를 베고 있었다. 뉴스를 듣고 바로 고인이 운영하던 도서출판 광민사로 달려갔다. 한국노동문제의 구조, 노동의 역사 등 노동문제 관련 서적을 중점적으로 출판했던 고인과 노동현장으로 들어가는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12월 1일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님을 위한 행진곡, 윤상원’ 시묵화 전시회 때. 고 이태복(맨왼쪽) 윤상원열사기념사업회 이사장과 필자 이선근(오른쪽 둘째) 대표이 마지막으로 함께한 순간이다. 필자 제공
지난 12월 1일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님을 위한 행진곡, 윤상원’ 시묵화 전시회 때. 고 이태복(맨왼쪽) 윤상원열사기념사업회 이사장과 필자 이선근(오른쪽 둘째) 대표이 마지막으로 함께한 순간이다. 필자 제공

고인은 좋은 생각이라며 흔쾌히 현장을 소개해주었고, 나는 구로공단의 한 섬유업체에 위장취업을 하게 되었다.그런데 몇 달 지나 복학이 허용되어, 잠정적으로 현장을 떠나 학교로 돌아가게 되었다. 자연히 ‘80년 서울의 봄’이라는 미증유의 시기를 맞아 어떻게 민주화운동을 펼칠 것인가 논의가 벌어지는 현장을 목도하게 되었다.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전두환의 쿠데타로 새 군사정권의 등장이 예고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학생운동이 그동안의 축적된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기보다는 신군부와의 정면승부를 피하려는 세력들이 서울대의 주류를 차지해 ‘서울역 회군’을 결정했다. 결국 이는 유신체제를 청산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게 광주만 외로이 남은 채, 광화문까지 진출하였던 15만 학생들의 비원은 허공으로 사라져갔다.

이에 고인을 만나 학생운동의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자 그는 바로 시의적절한 방향이라며 적극 찬성하였다. 노학연대가 1980년 5월 발족한 전국민주노동자연맹과 함께 81년 2월 창립된 전국민주학생연맹이라는 실체로 본격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고인은 그랬다. 방향이 옳다면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무실역행을 금과옥조로 삼았던 것이었다. 이른바 ‘학림 사건’(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국민주학생연맹)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40일 동안 엄혹한 고문을 받고도 용산경찰서로 이감된 후 많은 동지들이 힘겨워할 때 ‘사노라면’ 노래를 부르며 절망하지 말자고 용기를 주기도 했다.

7년이 넘는 옥살이 이후에도 그는 노동운동을 통한 사회개혁을 멈추지 않았다. 주간 노동자신문을 창간하여 <노동일보>로까지 발전시켜 노동언론을 만드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청와대 사회복지수석과 복지부 장관 시절의 행정실무 경험은 고인의 사상의 지평을 더욱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고 이태복(왼쪽 둘째) 전 복지부 장관과 이선근(맨가운데) 대표 등 전민노련· 전민학련 피해자들이 1981년 이른바 ‘학림 사건'에 대한 2009년 7월 진실화해위의 재심 결정을 환영하는 성명을 낭독하고 있다. 2012년 6월 대법원은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확정했다. 연합뉴스
고 이태복(왼쪽 둘째) 전 복지부 장관과 이선근(맨가운데) 대표 등 전민노련· 전민학련 피해자들이 1981년 이른바 ‘학림 사건'에 대한 2009년 7월 진실화해위의 재심 결정을 환영하는 성명을 낭독하고 있다. 2012년 6월 대법원은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확정했다. 연합뉴스

고인은 이후에도 노학연대를 더욱 발전시켰다. 민중의 삶에 큰 짐이 되고 있는 아젠다를 발굴하여 카드 수수료, 기름값, 휴대전화비, 약값, 금리 등의 인하를 위해 범국민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임으로써 ‘민생연대’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안했다.

이렇게 고인은 끝없이 고민하고 연구하고 무실역행하는 지도자상을 우리에게 숙제처럼 남기고 표표히 별처럼 졌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참 고생 많이 하셨소. 이제 편히 쉬십시오. 태복이 형.

이선근/경제민주화를 위한 민생연대 대표·전 전국민주학생연맹 중앙위원·학림동지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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