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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궂긴소식

“하늘에서라도 부모님 만나 아버지·어머니 불러보시길”

등록 2021-09-26 17:52수정 2022-03-17 11:59

〔가신이의 발자취〕 봉강 정해룡 선생 조카 국상씨 영전에

정국상씨가 영정 사진에서 웃고 있다.          정길상씨 제공
정국상씨가 영정 사진에서 웃고 있다. 정길상씨 제공

부친 일제 강점기에 노동운동 하다

한국전쟁 중 모친과 함께 북으로

동생은 69년 일본 밀항해 북녘행

65·67년 부친 ‘남 잠행’ 드러났을때

‘간첩’ 무혐의에도 직장 잃고 공사판 전전

“이념에 충실한 아버지 둔 죄로

그의 인생은 너무 외롭고 무서웠다”

정국상씨가 여든한 살을 일기로 지난 23일 하늘로 갔다. 그는 귀골의 미남이다. 눈이 깊고 목소리가 맑다. 흰 이를 드러내고 웃을 때면, 천사 같아 보인다. 성품은 곧으면서도 부드럽다. 열심히 살아 성공도 했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 석 자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그를 노천에 내놓지 않았다. 필요한 일이나 사람이 아니면 나서지도 만나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는 내가 쓴 소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의 주인공인 봉강 정해룡의 조카다. 봉강은 일제 강점기에 보성전문학교에 거액의 지원금을 내는가 하면, 향리인 보성군 회천면에 양정원을 세워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기성인을 대상으로 야학을 폈다. 광복이 되자 봉강은 농지를 소작인들에게 헐값에 양도하는가 하면, 부리고 있던 노속 열일곱 세대에게 토지를 나눠주어 독립해 살게 했다.

광복이 되었으나 그 기쁨 뒤로 먹구름이 밀려왔다. 나라를 미국과 소련이 분점함으로써, 한반도가 친소 공산주의 국가와 친미 자본주의 국가로 분단될 위기에 몰렸다. 봉강은 통일된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라고 인식하고 여운형의 근로인민당에 들어가 재정부장을 맡았다.

고인과 아내 김봉임씨. 정길상씨 제공
고인과 아내 김봉임씨. 정길상씨 제공
봉강의 아우 정해진은 생각이 달랐다. 경성대를 나와 동경대 대학원에 들어간 정해진은 국제공산주의 운동가가 되었다. 그는 해방이 되자 부평에서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1950년 2월 경찰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 병감(病監)에 수용되었다가 6•25를 맞은 그는 공산당 간부로 활동하다 인천상륙작전 직후 월북했다.

그런 아버지를 둔 정국상에게 세상은 살얼음판 위의 미로였다. 그는 초등학교를 대여섯 군데나 옮겨 다녔다. 경찰이 그를 붙들어 아버지를 검거하려 해서였다. 그는 정규 중학교가 아니라 공민학교 과정을 거쳐 검정으로 중학과정을 마쳤다. 친척의 도움으로 목포고를 나온 그는 장학금을 주는 한양대 상대에 들어갔고, 신원조회 문턱이 낮은 한양대 대학병원에 취직했다. 그러나 안정기는 짧았다. 1969년에 동생 정훈상이 일본에 밀입국해 재판을 거쳐 추방되어 북한으로 갔다. 일이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1980년 말 이후 봉강 일족은 풍비박산이 났다. 정국상의 아버지 정해진이 이북의 대남사업부 부부장이 되어, 1965년과 1967년에 큰아버지 봉강을 만나고 간 사실이 드러났다. 봉강은 1969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나머지 가족을 대상으로 광범한 수사가 진행되었다. 당국은 1981년 1월 정춘상가족 간첩단사건을 발표했다. 봉강의 아들 정춘상이 정해진을 따라 월북해 밀봉교육을 받고 돌아와 간첩활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재판을 거쳐 정춘상에게 사형이, 할아버지뻘인 정종희에게 징역 12년이, 정춘상의 막내동생 정길상에게 징역 7년이 선고되었다. 정국상은 아버지 정해진을 만난 적도, 간첩활동을 한 적도 없음이 밝혀져 무혐의로 풀려났으나 직장을 잃었다. 그는 가족을 위해 공사판을 떠돌아야 했다.

뒷줄 오른쪽이 고인의 부친(정해진)이다. 왼쪽은 봉강 정해룡 선생이며 아래는 조모(윤초평). 1943년 전남 보성의 정씨 고택 ‘거북정’에서 촬영했다.  정길상씨 제공
뒷줄 오른쪽이 고인의 부친(정해진)이다. 왼쪽은 봉강 정해룡 선생이며 아래는 조모(윤초평). 1943년 전남 보성의 정씨 고택 ‘거북정’에서 촬영했다. 정길상씨 제공

2000년 고향인 전남 보성 거북정에서 사촌 정길상(앞줄 왼쪽 둘째)씨와 함께 사진을 찍은 고 정국상씨 부부(앞줄 오른쪽).                              정길상씨 제공
2000년 고향인 전남 보성 거북정에서 사촌 정길상(앞줄 왼쪽 둘째)씨와 함께 사진을 찍은 고 정국상씨 부부(앞줄 오른쪽). 정길상씨 제공
고인의 영정 앞에서 아내(김봉임씨)와 직계가족이 사진을 찍었다. 맨 오른쪽은 정길상씨.                                                                      정길상씨 제공
고인의 영정 앞에서 아내(김봉임씨)와 직계가족이 사진을 찍었다. 맨 오른쪽은 정길상씨. 정길상씨 제공
1994년으로 기억한다. 정국상이 고려대 기획처장을 맡고 있던 나를 학교로 찾아왔다. 1930년대 중반에 큰아버지 정해룡이 농지를 팔아 보성전문학교를 추가로 지원하겠다고 인촌 김성수에게 언약했으나 이행하지 못한 사실을 알고 있다며, 조카인 그가 보성전문학교의 후신인 고려대에 지원금을 내겠다는 것이었다. 거금 7억 원이었다. 큰아버지가 지정해둔 농지를 시가로 치면 그만큼 된다고 했다. 그는 그 대신에 학교 당국에 봉강이 그의 할아버지 정각수의 이름으로 두 차례에 걸쳐 지원금을 낸 기록을 문서로 확인하고자 했다. 학교에는 기록이 없었다. 전시에 다 소실되었다고 했다. 그는 모교인 한양대에 성금을 내겠다며 돌아섰다. 내가 몸담은 학교에 지원금을 내지 않은 것은 아쉬웠으나, 그가 모진 장애를 뚫고 경제적으로 입신한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가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은 병감에 갇혀있는 아버지를 가족이 면회 갔을 때 따라가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 급장을 맡아 학교를 결석하기 싫었다고 했다. 부모 앞에 서서 ‘아버지’ ‘어머니’하고 불러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는데, 하늘에 올라 부모를 만났을 테니까 이제 뜻을 이룬 셈인가? 시인 천상병은 인생을 소풍에 비유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귀천). 정국상의 인생도 아름다운 소풍이었을까?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아버지를 둔 죄밖에 없는데, 그에게 인생은 너무 외롭고 무서웠다.

김민환 고려대 미디어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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