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9월 ‘보도지침’ 폭로 기자회견 때 최장학(맨왼쪽) 언협 공동의장이 성명서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 박용수씨 제공
‘ 사람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적 ’ 이라는 말이 있는데 , 지난 10일 우리 곁을 떠난 최장학 선배 하면 떠오르는 말이 ‘ 기적 ’ 입니다 . < 조선일보>에서 강제 해직당한 뒤 46 년이란 긴 세월을 직장 한번 갖지 못한 채 결핍 속에서 삶을 이어온 것이 마치 기적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 1975 년 3 월 조선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수호투쟁을 벌이다 32 명이 해직당한 것은 한국 언론사에서 전례 없는 ‘ 집단 학살 ’ 이나 다름없었습니다 . 아무런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일터를 잃었으니 마치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를 맞는 것과 같았습니다 . 비는 사정없이 쏟아지는데 꽤 오랜 동안 이를 피할 조그만 은신처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 해직 기자들은 당장의 생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장을 찾아나서 가까스로 남의 집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지만 , 최 선배는 그런 일자리마저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 그는 46 년 동안이나 비를 맞고 살아왔습니다 . 이런 수난은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 조선투위 ) 만이 아니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 동아투위 ) 와 1980 년 신군부에 의해 해직된 수많은 언론인들이 다 같이 겪은 일입니다 .
최장학 선배의 생애는 우리에게 특별한 감명을 줍니다 . 그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가난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고고한 기품과 존엄을 잃어본 적이 없으며 , 고달픈 삶 속에서도 빼앗긴 언론의 자유를 되찾기 위해 자유언론운동의 전위에 서는 것을 마다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 그는 1983 년부터 5 년 동안 조선투위의 제 2 대 위원장을 맡아 투쟁을 이끌었고 , 1984 년 12 월 민주언론운동협의회 ( 언협·지금의 민주언론시민연합 ) 가 창립될 때에는 송건호 선생 , 김인한 동아투위 위원장 , 김태홍 80 년해직언론인협의회 대표와 함께 공동의장을 맡았습니다 . 그는 1988 년까지 오랜 동안 언협을 떠받쳐준 4 개의 큰 기둥 가운데 한사람이었습니다 .
1986년 9월 ‘말’지 보도지침 보도 사건으로 언론인들이 구속되자 서울 마포 언협 사무실에서 송건호(왼쪽)·최장학(오른쪽) 공동의장이 ‘언론탄압 규탄’ 농성을 하고 있다. 사진 박용수씨 제공
1986년 9월 ‘보도지침’을 폭로해 구속됐던 김태홍(가운데) 언협 사무국장이 1987년 6월 결심공판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 돌아오자 송건호(오른쪽)·최장학(왼쪽) 공동의장이 환영하고 있다.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됐다. 사진 연합뉴스
1986 년 1 월엔 언협이 발행한 < 말 > 지 4 호의 편집인을 맡았다가 7 일 동안의 구류를 살기도 했습니다 . 언협은 1985 년 6 월 15 일 기관지 < 말 > 을 창간하여 제도언론이 알려주지 않는 주요한 뉴스들을 보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두환 신군부는 창간호 때부터 편집인인 성유보 사무국장을 유언비어 유포죄로 잡아다가 10 일 동안 구류를 살게 했습니다 . 그러나 잡지가 나올 때마다 성 국장 혼자 구류를 살게 할 수는 없었으므로 자진해서 유치장살이를 하겠다고 편집인을 맡은 것이 최 선배였습니다 . 우리는 이런 편집인을 ‘ 구류담당 편집인 ’ 이라고 불렀습니다 . 1986 년 9 월엔 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함께 ‘ 보도지침 ’ 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했는데 , 그때 송건호 의장과 더불어 구속의 위험을 무릅쓰고 언협을 대표해 회견에 나선 것도 최 선배였습니다 .
2003년 필명 최이산으로 <이산 열국지> 12권을 완역해낸 한학자 고 최장학 선생.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그는 또한 우리나라의 몇 손가락 안에 드는 한학자라 할 수 있습니다 . 광주의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힌 그는 해직당한 뒤 조규철·신호열· 이진영 선생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 40 여 년간 4 서·오경 , 제자백가 , 사마천의 사기 , 자치통감 등을 연구하여 그 깊이가 도저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 춘추좌전을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그 동안 나온 열국지의 오역을 바로잡아 < 이산 열국지 >(2003년 신서원) 12 권을 완역해 펴냈으니 그 학문의 깊이와 높이를 알만합니다 . 그는 후학들에게 사서·오경은 물론 노자, 장자를 강의하여 자신의 지식을 전수해 주었습니다 . 그밖에도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과거와 시대상황을 소설 형식을 빌어 자서전 (< 묻지 마라 을해생>(2018년 푸른역사)을 펴냈는데 , 이는 또 다른 형태의 회고록 전범이 될 만합니다 .
최장학 선배가 누구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청빈 속에서도 끝까지 언론의 자유와 참된 언론을 위해 싸워온 우리시대의 ‘ 고전적 선비 ’ 이자 ‘ 투쟁하는 언론인 ’ 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자신의 체구만큼이나 무거웠던 행동 , ‘ 말 ’ 로써 말하기보다는 ‘ 침묵 ’ 으로 더 많은 말을 했던 그 침묵의 향기도 옛 선비를 많이 닮았습니다 .
최장학 선배여 , 부디 가난이 없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 그리고 하실 수만 있다면 유사 이래 가장 큰 언론의 자유를 누리면서도 가장 추하게 타락한 오늘의 거짓된 언론을 바로 잡으려는 우리 해직 언론인들의 언론개혁운동을 도와주십시오 .
신홍범/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