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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엔지오

[편집국에서] 실드 치는 한겨레? / 이춘재

등록 2020-05-31 18:03수정 2020-06-01 09:47

이춘재 ㅣ 사회부장

<한겨레>에는 ‘편집위원방’이라는 텔레그램 단톡방이 있습니다. 편집회의에 참석하는 팀장급 이상 기자들이 기사에 대한 촌평이나 아이디어, 취재 정보 등을 공유하는 곳입니다. 며칠 전 이 방에 <한겨레> 기사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한 대학교수의 페북 글이 올라왔습니다. 그와 ‘페친’인 기자가 모니터링 차원에서 공유했는데,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회계부정 의혹을 다룬 기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윤미향 전 정의연 이사장(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개인 계좌로 김복동 할머니의 장례비를 모금한 것을 두고 횡령 의혹이 제기됐는데, 시민단체가 장례를 주관할 때 단체 대표 명의 계좌로 조의금을 모금하는 사례가 종종 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는 횡령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취지의 기사였습니다. 윤 전 대표의 횡령 여부는 결국 검찰 수사로 드러날 것이라는 ‘공자님 말씀’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이 기사에 그 교수가 왜 열받았는지 궁금하던 차에 앞서 페북 글을 공유한 기자가 이유를 알아보고 대략 전달해줬습니다. 김복동 할머니 조의금을 ‘김복동 유지 승계 활동비’라는 명목으로 장학금을 지급하면 본래 목적과 다른 용도로 썼기 때문에 기부금품법 위반인데, 왜 <한겨레>는 위법이 아니라고 ‘실드를 치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겨레>가 접촉한 전문가들은 다른 유권해석을 내놨습니다. ‘모집된 기부금품을 그 목적에 사용하고 남은 금액이 있는 경우’에는 등록청에 신고를 받아 ‘모집 목적과 유사한 곳’에 쓸 수 있기 때문에 법 위반으로 단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김복동 할머니의 조의금이니까 김복동 할머니의 평소 뜻에 따라 썼다면 ‘목적과 유사한 곳’에 쓴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교수의 페북 글은 지면에 옮기기 민망할 정도로 거칠었지만, 그래도 회계 전문가로 알려진 분이라 비난을 귀담아듣기로 했습니다. 독자의 쓴소리는, 당장은 듣기 싫더라도 나중에 보약이 됐던 경험이 있어서입니다.

<한겨레>의 정의연 기사에는 정반대의 ‘원망’도 쏟아집니다. 경기도 안성 힐링센터 고가 매입 의혹을 비중 있게 다룬 기사에 정의연과 함께 일했던 분들의 항의에 가까운 원망입니다. 불법이나 비리가 드러난 것도 아닌데 왜 보수언론의 ‘정의연 죽이기’에 동참하냐는 지적입니다. 이분들의 <한겨레>에 대한 원망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정의연의 전신인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 일본군 ‘위안부’ 인권운동의 시작을 한겨레신문사와 함께 한 각별한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대협 초기 멤버 중 한 분인 윤정옥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1970년대에 일본인 기자의 글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된 뒤 연구 활동에 나섭니다. 그는 1980년에 일본 오키나와에 홀로 살던 배봉기 할머니를 처음 만난 이후 홋카이도와 중국, 타이 등에 흩어져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수소문해 만나 증언을 수집했습니다. 그의 역작이 처음 빛을 보게 된 곳이 바로 <한겨레신문>입니다. 1990년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라는 제목의 연재물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당시만 해도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는 일제 ‘학도병’ 출신들 사이에서 소문으로만 돌았고, 사회는 ‘나라 망신’이라며 쉬쉬하던 분위기였습니다. 윤 교수의 연재기사에 일본군 ‘위안부’ 역사를 바로 알자는 여론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정대협은 그 산물입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잘 알고 있는 <한겨레>라면 정의연을 보호해주는 데 더 힘을 쏟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한겨레>가 안성 힐링센터 등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은 정대협의 역사와 대의를 잘 몰라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잘 알고 있기에 더 날카롭고 정확하게 보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게 정의연을 진짜 돕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용수 할머니의 두 차례 기자회견은 정의연과 인권운동단체에 큰 과제를 던졌습니다. 인권운동이 피해자를 소외시킨다면 지속가능할 수 없음을 일깨웠습니다. <한겨레>도 큰 숙제를 안았습니다. 다양한 독자 의견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단편적 사실과 본질적 가치가 부딪힐 경우 어떻게 보도할 것인가. 참 어렵습니다.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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