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이의 발자취] 자유언론실천운동의 ‘맏형’ 윤활식 선생 영전에
75년 옛 ‘동아방송’ 차장 피디 때
자유언론수호 투쟁 동참해 해직
79년 긴급조치 9호로 구속 고초
88년 한겨레 창간 멤버로 94년 퇴직
“후배들 결단 필요할 때 이끄는 역할”
75년 옛 ‘동아방송’ 차장 피디 때
자유언론수호 투쟁 동참해 해직
79년 긴급조치 9호로 구속 고초
88년 한겨레 창간 멤버로 94년 퇴직
“후배들 결단 필요할 때 이끄는 역할”
윤활식 전 한겨레신문사 전무
고인의 빈소.
1975년 3윌 17일 신새벽,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자리 잡은 동아일보사 사옥에서 세계 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참극이 벌어졌다. 3층 편집국과 4층 방송국에서 농성을 벌이던 동아일보, 신동아, 여성동아, 출판부 기자들과 동아방송 피디, 아나운서, 기술인 등 130여 명이 정체불명의 폭력배들에게 기습을 당해 회사 밖으로 밀려난 것이었다. 그것이 당시 동아일보사의 실질적 사주 김상만(인촌 김성수의 장남)과 박정희 정권이 야합해 꾸민 ‘작전’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명백히 드러났다. 그 배경은 아래와 같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민선의 장면 정권을 몰아내고 무지막지한 ‘군사 독재’를 시작한 박정희(당시 소장)는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비명횡사하기까지 18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국 사회를 평생 지배할 듯한 ‘절대 군주’처럼 보였다. 그러나 철옹성처럼 보이던 박정희의 권좌는 1974년부터 천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청년·학생운동권과 재야 민주화 세력이 강력히 연대해서 그에게 도전했기 때문이다. 그 연대의 일각에는 동아일보사의 젊은 언론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당시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사건들’을 일으켰다. 그해 3월 10일, 한국 언론사상 처음으로 노동조합(서울시가 신고 받기를 거부한 법외노조)을 결성한 뒤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그 선언은 이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민주사회를 유지하고 자유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 기능인 자유언론은 어떠한 구실로도 억압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임을 선언한다. (···) 따라서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민주사회 존립의 기본 요건인 자유언론 실천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뜨거운 심장을 모아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1.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1.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강력히 거부한다.”
당시 윤활식 선생은 동아방송 제작부의 차장으로서 ‘고참 피디’였다. 1975년 3월 17일 동아일보사에서 기자, 피디, 기술인 등이 강제 추방을 당할 때 윤 선생은 간부 사원으로서는 아주 드물게 그 대열에 자진 합류하셨다. 그때 결성된 단체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이다. 그로부터 46년이 되도록 윤 선생은 동아투위의 ‘최고참 위원’으로 열심히 활동하셨다.
윤 선생이 동아투위 활동을 하면서 가장 심한 고난을 겪으신 것은 1978년 말이었다. 동아투위가 재야 민주인사들과 함께한 송년 모임에서 <동아투위소식 송년 특집호>를 배포했는데, 그분은 후배인 이기중, 성유보와 ‘공범’이 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분은 ‘감옥에서 맞은 딸의 결혼식’이라는 글(<유신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1975>에 수록)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1979년 1월은 유난히 추웠다. 연행되어 조사를 받으며 갇혀 있던 중부경찰서의 일주일은 잊을 수가 없다. 하늘은 내게 무슨 큰일을 맡기시려고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걸까? 벌여 놓은 일이나 가족을 생각하면 심란하고 답답했다. 그런 내 마음을 다잡아준 것은 돌아가신 선친의 삶이 보여준 교훈이었다. 내 선친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우다 두 번이나 옥고를 치르셨다. 또 해방 후에는 민족의 분단을 막아 보려고 공산정권이 들어선 북한 땅에서 거사하여 싸우시다가 희생되셨다.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결단한 일에 온 몸을 던지신 나의 아버지. 그분은 내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나의 결단이 요구될 때 늘 나를 인도하는 별이 되어 주셨다.”
윤활식 선생은 그분의 아버님처럼 동아투위 사람들이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 때면 언제나 그들을 ‘인도하는 별이 되어 주셨다.’ 그런데 그분은 이제 우리 곁에 계시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굳게 믿는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신 윤 선생께서 ‘하늘나라’에서 언제나 ‘우리를 인도하는 별’이 되어 주실 것이라고.
김종철·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
연재가신이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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