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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미디어

[젠더 프리즘] 가이드라인은 참 많다 / 이정연

등록 2020-06-28 18:32수정 2020-06-29 12:26

이정연 ㅣ <한겨레> 소통젠더데스크

“제목과 기사 내용에 ‘계모’라는 표현이 들어갔는데, 여기 가이드라인을 보면 가급적 사용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네요. 고쳐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6월2일 천안에서 9살 어린이가 아동학대로 중태에 빠진 사실이 알려졌다. 다음날 인쇄되어 독자들에게 전달될 기사를 한줄 한줄을 읽어내려가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눈시울을 붉히고 앉았지만, 지나칠 수 없었다. ‘계모’라는 표현에 눈길이 멈췄다. 바로 아동학대 보도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한창 마감하느라 바쁜 임석규 한겨레 편집국장과 권태호 기획부국장에게 갔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타당한 지적이라 보고, 제안을 수용했다.

천안 아동학대에 이어 창녕 아동학대 사건이 알려지면서, 언론은 경쟁적으로 아동학대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흥미진진한 경기를 관전하듯 보도했다. 천안 아동학대 사건의 피해 아동이 6일 저녁 숨지자, ‘감금 학대 계모 검찰 송치…. 살인죄 적용될까’, ‘여행 가방 계모…. 살인죄 가능’ 따위 제목을 단 기사가 떴다. 학대 행위자에게 ‘가방 계모’라는 별명까지 붙인 언론사도 있었다.

“한순간에 다 무너지는 느낌이죠.” 재혼 가정을 꾸려 사는 지인 ㄱ은 말했다. ‘계모’라는 단어에 덧입혀진 편견과 부단히 싸우며 사는 그에게 아동학대를 별 고민 없이 전달하는 기사는 마음을 후비는 날카로운 송곳과도 같다. 그런 그가 예민하다며 편견이 아닌 사실 아니냐고 되묻는 사람들도 있단다. 2019년 6월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2018년 아동학대 주요 통계에서 학대 행위자와 피해 아동의 관계를 보면, 2만4604건의 아동학대 중 친부모가 행위자인 경우가 1만8084건(73.5%)이었는데, 양부모가 행위자인 경우는 777건(3.2%)이었다. 그러나 ㄱ은 이 통계를 들이밀 자신이 없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는 힘없이 답했다.

‘나와는 다른 사람들’로 묶어 말과 글로 돌팔매질하기는 얼마나 쉬운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으며 안도하면 얼마나 편한가. 가족 유형에 대한 단단한 편견과 혐오를 한국 언론은 더 단단하게 만든다. 한달여 아동학대 관련 보도가 이어지는 걸 지켜보며 무기력했다. <한겨레>에서 ‘계모’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려 노력한다 한들, 한국 언론사들이 매번 반복하는 ‘클릭 유도용’ 제목 짓기와 기사 쓰기 행태는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을까.

다행스러운 건 독자들이 먼저 나서 편견과 혐오를 조장하는 언론의 행태를 다양한 방식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끔해서 아프지만, 계속 귀 기울일 수밖에 없는 고마운 목소리들이다. 비판을 마주하면 ‘그렇다면 언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의문은 금세 풀 수 있다. 사건을 보도할 때 언론인이 따라야 할 권고사항을 정리한 ‘보도 가이드라인’이 있다. 참 많다. 이슈 유형마다 있다시피 하다. 한국기자협회 누리집에는 자살보도 권고기준, 인권보도준칙, 국가안보 위기 시 군 취재·보도 기준,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 권고기준, 재난보도준칙, 감염병보도준칙, 혐오표현 반대 미디어 실천 방안 등이 있다.

아동학대 보도 가이드라인도 당연히 있다. 보건복지부와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은 2018년 6월 ‘아동의 인권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 등의 5가지 원칙을 담은 ‘아동학대 사건 보도 권고기준’을 내놓았다. 권고기준에는 “아동학대 사건을 보도할 때, 편견을 조장하는 표현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계모의 아동학대 살인’과 같이 ‘계모’를 부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가족 유형에 대한 편견이 담겨 있는 용어나 표현은 신중하게 사용해야 합니다”라는 내용이 담겼다.

언론인들이 독자들의 비판에 ‘잘 몰랐다’고 핑계 대기 어렵다. 모르는 걸 아주 쉽게 알 수 있는 세상이니까. 이제 더 어려운 일이 남았다. 아는 걸 실천하기. 관성에 따라 쓰기를 멈추고, 비판을 귀담아듣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xingx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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