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성 구현이냐, 시청권 박탈이냐.
<한국방송>(KBS)이 지상파의 구조적 위기 속에 추진하는 지역방송 광역화를 둘러싸고 논란에 휩싸였다. 한국방송 쪽은 양승동 사장이 2018년 취임 당시 약속한 ‘지역방송 활성화’ 차원에서 인력·예산·장비 등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지역 밀착형 뉴스를 강화하겠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대상 지역국 쪽에선 대도시 광역 거점센터(총국)에 통합한 뒤 결국 폐쇄의 수순을 밟아 지역민의 시청권을 박탈하는 것 아니냐는 반발 목소리가 높다.
■ 대도시로 묶는 지역방송 광역화
한국방송은 7개 지역국(진주, 안동, 포항, 목포, 순천, 충주, 원주)의 티브이 제작·송출 기능을 5개 총국(창원, 대구, 광주, 청주, 춘천)에서 통합 운영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며 지난 3월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에 ‘지역방송국 변경 허가 및 사업계획 변경 승인’을 신청한 상태다. 이 방송의 지역국은 모두 9곳인데 강릉과 울산은 제외됐다. 산불 등의 사고 때 재난방송으로서 신속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이유다.
중소도시 방송국을 대도시 권역으로 묶는 ‘지역방송 광역화’ 논의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한국방송은 2004년 정연주 사장 시절에 지역 뉴스 확대와 지역 콘텐츠 강화를 내세워 16개 지역국을 9개로 정비하는 지역방송국 통폐합을 단행했다. <문화방송>(MBC)도 2011년 진주와 창원방송을 합병해 <엠비시경남>, 2015년엔 강릉과 삼척방송을 통합해 <엠비시강원영동>을 출범시켰다.
경영난에 처한 지상파가 택한 생존 방식인 광역화는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불가피한 조처라는 현실론도 있지만 단순히 방송사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역 문화거점 역할이 크게 축소된다는 점에서 지역사회의 비판도 거셌다. 이번에도 대상 지역국 주민과 시민단체, 지역 정치권 등은 ‘지역방송 말살 정책’이라며 규탄하고 있다. 다양한 시청자가 거주하는 삶의 공간인 지역을 외면한 대책으로, 지방분권에 기반을 둔 풀뿌리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정부 추세에도 역행한다는 비판이다. 7개 지역 시민대책위원회 등으로 구성된 ‘한국방송 지역방송국 통폐합 반대 시민행동’의 이선경 대표는 “한국방송 본사가 적자 해소를 위해 7개 방송국을 폐쇄하려고 한다. 지역에 대한 철학과 고려가 전혀 없다. 국가 균형발전을 저버리는 중앙집권적 운영은 지역을 고사시킨다”며 철회를 촉구했다. 시민행동은 수신료 거부 불사까지 거론한다. 7곳의 주민이 분담하는 수신료가 연 700억원에 달한다며 이에 걸맞은 지역 뉴스를 제공하라는 압박이다.
■ 7시 뉴스의 지역 의제 설정
한국방송 쪽은 지역국 단계적 폐쇄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지역 뉴스도 취재 시스템을 개선해 양적·질적으로 개선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국방송 관계자는 “재원과 인력이 한정돼 있기에 효율성을 고려해 기능 조정에 나선 것이다. 기자나 촬영기자 등의 소속은 총국으로 바뀌어도 하는 일과 역할은 그대로다. 지역 뉴스는 기존에 7시 뉴스에 4~5분, 9시 뉴스에 12~13분으로 모두 18분 정도였지만, 지금은 7시 뉴스를 총국에서 자체적으로 40분 편집·방송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뉴스 전체를 지역 뉴스로 채우는 <뉴스7>은 제주총국이 첫 시범사업을 벌인 뒤 반응이 좋아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전에 중앙 뉴스가 나가고 가장 끝에 5분 정도 지역 뉴스를 붙였던 것과 달리, 머리기사부터 지역 의제를 설정하거나 지역에 밀착한 심층·기획기사를 내보낸다.
광주총국 <뉴스7>에 대해선 학계에서도 긍정 평가가 나온다. 지난 2월 시작할 때만 해도 코로나19가 극성이었기에 지역에 특화한 재난방송을 하고, 4·15 총선 전후로 유권자 시각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5·18 민주화운동 40년 등 시기적으로도 지역 뉴스 안착에 도움이 됐다. 그동안 중앙 중심 보도에서 지역 뉴스는 주로 부정적인 사건이 다뤄졌다면 <뉴스7>에선 지역 이슈를 위주로 지역성 구현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평가다.
윤석년 광주대 교수는 “한국방송이 <뉴스7> 등을 통해 지역 뉴스를 강화한 것은 맞다. 그러나 아직도 지역 뉴스 비율은 낮은 편이다. 소외된 작은 지역의 뉴스가 묻히지 않아야 한다. 또 공영방송으로서 지역 감시활동이 느슨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선제 장치가 필요하다”고 짚었다. 지역국의 한 기자도 “(7시 뉴스와 달리) 9시 뉴스에선 지역 뉴스가 사라졌다. 자잘한 지역 뉴스는 생산되는데 시간이 배정되지 않아 불만이 터져 나온다”고 전했다.
■ 내부에서도 찬반 엇갈려
광역화 안은 한국방송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며 ‘뜨거운 감자’가 됐다. 과반 노조인 전국언론노조 한국방송본부 노조는 “방송국만 있다고 진정한 공영방송은 아니다. 선택과 집중으로 지역방송의 경쟁력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며 지난 5일 방통위를 방문해 ‘지역민들에 대한 양질의 보편적 방송 서비스’ 차원에서 조속한 정책 결정을 촉구했다. 그러나 소수 노조인 한국방송 노조는 ‘지역방송국이 폐쇄될 것’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지역국에서도 젊은 구성원은 대도시에서 근무하게 되는 것 등에 찬성한다면 중장년 구성원은 반대하는 분위기다.
지역방송 활성화 안이 지역성 구현과 지역 감시 역할 등 지속 가능한 지역 미디어로 뿌리내리기 위한 실효성 있는 대책이 되려면 언론개혁의 큰 그림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나온다. 조항제 부산대 교수는 “구조조정 문제만 나오면 지역방송이 가장 먼저 피해를 본다. 광역화를 해서 얻는 실익이 뭔지, 기존 결과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효율성을 따지고 주민을 설득해야 한다. 지역방송을 포함한 재구조화와 공적 방송의 큰 그림 속에서 미래를 그려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문현숙 선임기자
hyuns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