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방송제작 성폭력 실태조사’에 나타난 성폭력 피해 유형별 사례. 방송계 갑질 119·방송스태프 노조 준비위원회 제공
“그 동안 몸담았던 프로그램 현장 거의 모든 곳에 성폭력이 존재했습니다.(중략) 외모 비하,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야한 농담, 일상적 언어 성폭력, 성상납(받은 일) 자랑, 회식자리 신체 접촉, 성적 요구…“(방송제작현장 실태조사 사례 중에서)
여성·비정규직이 다수인 방송제작 현장 노동자 열 명 중 아홉 명이 성폭력 피해를 겪은 적이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방송계 갑질 119·방송스태프 노조 준비위원회는 18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민주노총 교육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같은 방송제작 현장 성폭력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온라인으로 진행된 실태조사에는 총 223명의 방송제작현장 노동자가 참여했다. 설문 참여자 중 여성이 93.7%였고, 프리랜서·파견·계약직 등 정규직이 아닌 이가 99.1%였다. 직군별로는 작가 178명, 연출직 38명, 미술 1명, 후반 작업(녹음 특수효과) 4명, 기자 1명이 설문에 응했다.
설문 응답자 중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고 답한 이는 89.7%에 달했다. 사례별로는 (복수응답 가능)△외모에 대한 성적 비유나 평가(70.4%)△음담패설(57.8%)뿐 아니라, △신체 접촉을 하거나 하도록 강요(43.9%)△성관계 요구(13.9%)△성적 요구 불응을 이유로 고용평가에 불이익 (4.5%) 등이 지적됐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지목한 가해자는 방송사 소속 임직원 인경우가 47%로 가장 많았다.
응답자들은 성폭력 발생 이후 고용 불안 등 구조적 원인으로 인해 문제 제기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성폭력 피해 경험을 밝힌 응답자 중 80.4%가 ‘참고 넘어갔다’고 답했다. 방송국·소속 회사의 공식창구로 대응했다는 답변은 2%였다. '참고 넘어갔다'고 답한 응답자들은 절반 이상이 그 원인(복수응답)으로 '고용형태 상 열악한 위치 때문'(57.7%), ‘문제를 제기해도 해결될 것 같지 않아서’(55.8%)를 꼽았다. 성폭력 사건에 문제를 제기한 37명 중 32명(86.5%)은 방송국·소속 회사 차원의 사후 조처가 없거나, 있어도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답했다. 또 전체 설문 응답자 223명에 ‘성폭력 사건 발생 시 방송사가 적절한 처리를 할 것으로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88.3%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이처럼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로는 ‘노동자의 신분상 열악한 지위로 방송사의 공식 사건 접수에서 제외되거나 제외될 염려가 있기 때문’(83.1%)이 꼽혔다. 방송제작 현장 노동자를 고용한 방송사·외주사·파견 회사 등은 성폭력 예방 교육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전체 응답자 중 79.9%가 ‘성폭력 예방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답했다.
권순택 언론개혁시민연대 활동가는 △폐쇄적 ‘프로젝트 단위 고용’(프로그램 마다 고용 성립)시장△높은 비정규직 비율△높은 외주제작 비율 등 방송계 특성으로 인해 다른 업계보다 성폭력 피해 발생 비율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고 분석했다. 또 그는 “피해자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성폭력 신고 센터 등 별도의 기구 설치가 필요하다. 방송사가 아니라 스태프의 이해 관계를 이야기하는 단체가 이를 주도해야 하고, 정부 부처의 지원도 필요하다”면서 “방송제작 현장의 성폭력 문제를 포괄하는 ‘노동 인권’ 문제를 방송사 재허가 평가 기준에 포함해야한다. 또 평가에 실질적 영향을 주는 배점을 부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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