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범자들> 시사회에서 최승호 감독의 동의를 받아 스크린에 비친 김장겸 <문화방송> 사장을 촬영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그래픽 이정윤 기자 bbool@hani.co.kr
‘기자 김장겸’은 어떻게 ‘사장 김장겸’에 이르렀을까. 1987년 <문화방송>(MBC)에 취재 기자로 입사한 김장겸 사장은 올해 2월 사장으로 선임되기 전까지 29년 동안 보도본부를 떠난 적이 없다. 그가 사장에 오르기까지 주요 이력은 모두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만들어졌다. 그는 정치부장→보도국장→보도본부장→사장으로 승진하며 <문화방송> 브라운관 뒤에서 뉴스 보도를 지휘했다. 그의 ‘성공’과 공영방송의 ‘추락’은 역방향으로 궤를 같이했다. 그가 주요 이력을 쌓아올리는 동안 <문화방송> 뉴스는 거꾸로 망가졌다. ‘촛불 항쟁’이 지나간 뒤 김장겸 사장은 고용노동부에서 소환 통보를 받았다. 김장겸 사장은 공정 방송을 요구하며 2012년 파업에 참여한 기자들의 부당 징계·전보에 앞장선 혐의를 받고 있다. 그가 사장 자리에 머무는 한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방송 장악’은 현재 진행형이다. 김장겸 사장은 23일 “정치권력과 언론노조가 손을 맞잡고 물리력을 동원해 법과 절차에 따라 선임된 경영진을 교체하겠다는 것은 엠비시를 김대업 병풍 보도나 광우병 방송, 또 노영방송사로 다시 만들겠다는 것 아니겠냐”며 “퇴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겨레>는 지난달부터 김장겸 <문화방송>(MBC) 사장에게 대면·서면 인터뷰를 수차례 요청했다. 그는 기사 마감까지 어떤 답변·해명도 하지 않았다. <한겨레>는 <문화방송> 구성원,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 등 15명을 인터뷰해 그에 관한 사실과 이야기를 모았다. <문화방송> 입장문, 기자회 특보, 전국언론노동조합 문화방송본부 보고서·성명, 취재 기록 등도 살폈다. <2008-2017 왜곡편파보도백서>(민주언론시민연합), <한국 공영 방송의 정체성>(조항제), <공영방송 뉴스의 불편부당성 연구>(박성호) 등도 참조했다.
김장겸 <문화방송>(MBC) 사장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 21일 <한겨레>를 비롯한 취재진이 고용노동부 서울서부지청 건물(서울 도화동)을 아침 8시부터 밤 9시까지 지키며 오고가는 사람들을 살폈다. <문화방송>에 대한 특별근로감독을 실시 중인 고용부가 김장겸 사장에게 이날로 3차 소환 통보를 했기 때문이다.
김장겸 사장은 지난 5년여 동안 보도국 간부·임원을 맡으며 2012년 파업에 참여한 <문화방송> 기자·피디 등을 부당 징계·전보 조치하고 노조를 탄압한 책임자로 지목돼 왔다. 지난 2월 사장으로 선임된 그는 부당노동행위와 보도 공정성·신뢰성 훼손을 이유로 <문화방송> 안팎에서 퇴진 요구를 받았다. 빗발치는 퇴진 요구에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온 김장겸 사장은 수사 결과에 따라 ‘피의자 신분’이 될 처지에 놓였다. 공영방송사의 수장이 노동권 침해 혐의로 수사받는 일은 한국 방송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고용부는 곧 문화방송에 대한 특별근로감독 절차를 마무리하고 그 결과를 검찰에 송치할 계획이다.
하지만 그는 혐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23일 확대간부회의에서 “본 적도 없는 문건으로 교묘히 ‘블랙리스트’라는 단어로 연결해 경영진을 흔들고 있다”며 ‘음모론’을 제기했다. “언론노조가 회사를 전면파업으로 몰고 가려는 이유는 한 가지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 유례없이 언론사에 특별근로감독관을 파견하고 각종 고소·고발을 해봐도 경영진에게 책임을 물을 근거가 없으니, 정치권력과 결탁해 합법적으로 선임된 경영진을 억지로 몰아내려는 게 아닌가.”
그는 정말 ‘억지 퇴진 요구’를 받고 있는 것일까.
김장겸 엠비시(MBC) 보도본부장이 지난 2월23일 오후 서울 여의도 방송문화진흥위원회로 들어서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세월호 보도 참사’ 책임자
2014년 세월호 참사 발생 5일 뒤인 4월21일 밤. 이정현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이 김시곤 당시 <한국방송>(KBS)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건다.
“지금 국가가 어렵고 온 나라가 어려운데 지금 이 시점에서 그렇게 해경하고 정부를 두들겨 패야지 그게 맞습니까?”(이정현)
“아니, 이 선배. 이게 뭐 일부러 우리가 해경을 두들겨 패려고 하는 겁니까?”(김시곤)
청와대 수석이 공영방송 보도국 간부에게 직접 전화로 압박을 가하는 이 ‘적폐’의 한 장면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호칭이다. “선배”. 한국 언론에서 정당을 출입하는 정치부 기자들이 정치인들을 통상적으로 부르는 말. 그런데 김시곤 국장은 정치부에서 일한 적이 없다.
부당 징계·전보 등 노조 탄압 의혹
고용노동부 소환 통보만 3차례
김장겸 혐의 부인 “노조-정치권 결탁
합법적으로 선임된 경영진 몰아내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 보도국장
정부 비판보다 피해가족 비판 우선
편집회의 참여자들 “정쟁으로 파악
야당이 지방선거에 이용한다 해석”
이명박 정권 출범 뒤부터 승진가도
정치부장·보도국장·보도본부장 거쳐
정부·여당 불리한 내용 보도 누락
김장겸 “파업 때마다 브랜드 가치↓”
2월 방문진 사장 후보자 면접에서
‘최순실 게이트’ 보도 성과 내세워
문재인 “공영방송 구조 개선” 의지
사장직 물러나도 법적 심판 남아
김시곤 보도국장과 이정현 청와대 수석을 ‘선후배 사이’로 만들어준 건 김장겸 사장이다. <한겨레> 취재 결과를 종합하면, 김장겸 사장은 2013년 5월 <문화방송> 보도국장 자리에 오른 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가 터지기 전까지 <한국방송>, <에스비에스>를 포함한 방송사 전·현직 보도국장들과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 최경환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등 당시 여권 실세 정치인들과의 친목 모임을 수차례 주선했다. 이 모임 참여자인 <와이티엔>(YTN) 정치부장·보도국장 출신 윤두현 당시 <디지털와이티엔> 사장은 2014년 6월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의 후임으로 청와대에 입성하기도 했다.
통상 언론사 국장급 간부들은 정보 교류와 취재를 위해 정치인이나 정부 고위 관료들을 만나왔다. 이 자리에 다른 언론사 간부가 동석하는 일도 더러 있다. 언론사 주요 인사들과 고위 정치인 간의 주기적 만남은 ‘선후배’ 관계로 발전하며 단순 교류를 넘어 ‘보도 짬짜미’를 낳을 가능성도 상존한다. 이 모임에 수차례 참여한 한 방송사 보도국장은 구체적인 대화 내용을 언급하기를 꺼리면서도 “김장겸 보도국장은 다른 언론사 간부에 견줘 친박 실세 정치인들과 더 깊은 사이로 보였다”고 말했다. “<문화방송>의 실세가 사장도 보도본부장도 아닌 보도국장이라는 걸 피부로 알 수 있었다”고도 했다.
해당 모임 참여자들은 <한겨레>에 “소통을 위해 언론을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만남을 갖는다. 문제될 만한 일은 없다”고 했다.
박근혜 청와대가 김장겸 당시 <문화방송> 보도국장에게도 전화를 걸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김장겸 보도국장이 이끈 세월호 참사 보도는 <문화방송>은 물론 한국 언론사에서도 기록적인 ‘보도 참사’로 손꼽힌다. 재난 피해를 최소화해야 하는 책무를 진 공영방송의 보도가 2차, 3차 피해를 불렀기 때문이다.
‘보도 참사’는 보도 책임자들의 인식에서 비롯됐다. <한겨레>는 2014년 김장겸 당시 보도국장이 세월호 유족들을 “깡패”라고 칭했다는 내용을 단독 보도했다.(
2014년 5월13일치 2면 ‘MBC 보도국장, 유족 ‘깡패’ 지칭 논란’)취재원 보호를 위해 공개할 수 없었던 편집회의 메모 전문과 회의 참석자 인터뷰를 통해 당시 <문화방송> 편집회의를 재구성해보면 김장겸 사장이 이끈 보도 참사의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2014년 4월25일 세월호 참사 열흘째인 이날 오전 편집회의에서 김장겸 당시 보도국장은 박상후 당시 전국부장에게 “밤새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묻는다. 전날인 24일 전남 진도 팽목항에 차려진 대책본부 상황실에서 세월호 실종자 가족과 이주영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 등의 면담이 저녁께 시작돼 자정을 넘긴 시각까지 이어졌다. 박상후 전국부장은 팽목항 상황을 보고하면서 “장관이 아줌마들하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상황으로 누그러졌다”면서도 “분위기는 따귀도 맞고 험악하며 카메라를 들이대면 돌 던지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전원 구조’ 오보에서 시작해 사고 현장 구조 작업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기성 언론을 향한 실종자 가족의 불신이 극에 달했던 시점이었다.
김장겸 보도국장은 “완전 깡패네. 유족 맞아요?”라고 되묻는다. 그는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들을 “깡패”라고 칭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정부 발표대로 ‘지상 최대의 구조 작전’이 제대로 진행 중인지 검증하는 대신 피해 가족들을 비판하라는 보도 방향을 제시했다. “얻어맞을 정도 상황이면 비판은 못하더라도 상황, 현상을 보여줘야 되는 거 아니냐. … (정부의) 수습 대처가 미흡하고 후진적이라 하더라도 무전기를 빼앗아 물에 뛰어들라고 할 수준이면 국가가 아프리카 수준이고. … 구조하는 사람들 생명은 존귀한 게 없고 자기 새끼만 중요하다는 그런 이기주의에서 나온 것 (아닌지) 고민해봅시다.”
‘정부보다 피해자가 문제’라는 김장겸 보도국장의 세월호 보도 기조는 그가 보도본부장으로 영전한 2015년 2월까지 꾸준했다. 김장겸 보도국장이 주재하는 편집회의에 수개월 참여한 기자 ㄱ씨는 “세월호 참사 초기에는 서울에 있는 기자들을 최대한 팽목항 등 현장으로 내려보내고 전력투구를 하려고 한 것 같다. 그런데 참사가 정치적 이슈로 번질 가능성이 생긴 뒤부터는 (김장겸 국장이) 자신의 아주 주관적인 시각으로 이슈를 다루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편집회의에 수개월 참여한 다른 기자 ㄴ씨는 “김장겸 국장은 당시 야당이 (2014년 6월로 예정된) 지방선거에 세월호 이슈를 이용할 것을 걱정했다”고 전했다. 즉 김장겸 보도국장은 세월호 참사를 ‘진영 대결’의 도구로 해석하며 ‘정쟁’ 이슈로 취급했다는 의미다. 그는 유족들에게 “작전세력이 붙었다”(편집회의 참석자 메모)고도 말했다.
세월호 참사 뒤 60%를 웃돌던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지지율이 50% 아래로 연일 하락세를 기록하자, 정부·여당과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여론전’이 벌어진 바 있다. 민경욱 당시 청와대 대변인(현 자유한국당 의원)은 “순수 유가족”이란 용어를 사용해 ‘배후 불순세력’을 떠올리게 했고, 한기호 당시 새누리당 최고의원은 “북괴 지령”, “정부 전복 작전”이란 말을 언급했다. “시체 장사”라는 막말로 대한약사회 징계를 받았던 김순례 대한약사회 부회장은 2016년 4월 총선 때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공천받아 국회의원이 됐다. 김장겸 보도국장이 이끈 세월호 보도는 거대한 슬픔을 혐오와 냉소로 전환시키려는 일각의 움직임과 맥을 같이했다.
지난 23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문화방송 사옥에서 김장겸 사장이 ‘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손팻말을 든 조합원 앞을 지나쳐 확대간부회의에 참석하러 이동하고 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문화방송본부 제공
이명박 정권 출범 뒤 승진가도
1979년 창원 마산고를 졸업한 김장겸 사장은 고려대 농경제학과, 신문방송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1987년 11월 <문화방송> 신입 공채 24기 기자로 입사했다.
“민주화를 기준으로 하면 87사번들이 1기죠.” 김장겸 사장과 같은 해 입사한 ㄷ기자의 말이다.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친 1987년 6월 항쟁은 ‘땡전뉴스’라는 이름으로 경멸받던 방송사 내부에도 민주화의 가능성을 열어줬다. 같은 해 12월9일에 <문화방송>에는 방송사 최초로 노동조합이 생겼다. 김장겸 사장을 포함한 24기 기자 9명은 ‘수습’ 딱지를 뗀 1988년 5월 전원 노조에 가입했다.
한국 방송사에서 방송사 내부 노조의 탄생은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오늘날 일각에서는 사장 선임과 인사권 행사 등에 목소리를 높이는 방송사 노조를 가리켜 ‘정치적’이라고 비판하지만, 방송사 노조의 태생 자체가 ‘정치가 압사시킨 언론이 제자리를 찾기 위한 몸부림’의 결과였다. <문화방송>에서 처음 노조가 만들어졌을 때 사장으로 있던 황선필씨는 청와대 대변인에서 공백기 없이 곧바로 <문화방송>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 일이 당연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시민항쟁으로 동력을 얻은 <문화방송> 노조는 창립 8개월 만에 ‘낙하산 사장’ 황씨를 퇴진시켰고, 후임으로 투입된 유정회 국회의원 출신 김영수 사장도 막아냈다. 수차례 파업 끝에 국장책임제 등 제도적 장치를 얻어내 방송 민주화를 진전시켰다. 지상파 최초로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특집 다큐멘터리 <어머니의 노래>(1989년 2월3일)는 이러한 방송 민주화 운동이 마침내 브라운관으로 시민을 만난 첫 결과물이었다. 시청률 44%, 점유율 59%. ‘승리’의 경험은 방송사 내부 민주화 운동의 핵심 동력이 됐고, 시민들은 <문화방송>을 달리 보기 시작했다. 지난 30년 동안 노사 간 긴장과 균형이 공영방송을 공영방송답게 존재하도록 했다.
김장겸 사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지난 23일 열린 확대간부회의에서 노조의 역사성과 활동 목적을 부정했다. “<문화방송>은 지금까지 모두 12번의 파업을 했다. 파업을 할 때마다 엠비시의 브랜드 가치는 계단식으로 뚝뚝 떨어졌으며 그때마다 경쟁사들이 성장할 기회를 만들어줬다”고 했다. 노조를 문재인 대통령과 여당을 위한 “홍위병”에 빗대기도 했다. 그 때문에 노조가 자신을 향해 “이중잣대의 편향성 압력”을 넣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장겸 사장은 1988년 노조에 가입하긴 했으나 활동은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노조에서 주최하는 집회나 모임에 거의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명박 정권 때인 2009년 4월께 노조 사무실을 찾아와 탈퇴 의사를 밝혔다. 당시 노조 집행부였던 한 기자는 “김장겸 당시 네트워크부장이 ‘(노조) 할 만큼 했다’며 탈퇴하겠다고 했다”고 기억했다. 4개월 뒤면 노무현 정권 때 임명된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옥경 이사장 등의 임기가 끝나는 시점이었다. 이미 <와이티엔>에서 ‘낙하산 사장’ 반대 투쟁으로 대량 해직·징계 사태가 벌어졌고, <한국방송>에서 정연주 사장이 불법적으로 해임되는 등 이명박 정권의 ‘방송 장악’이 노골화한 상태이기도 했다.
“그는 엠비시가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에 편파적이고 친민주당 보도를 한다는 비판을 자주 얘기하고 다녔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 인사 물먹은 게 많다는 피해의식이 강했다.” <문화방송> 기자들이 공통으로 언급하는 김장겸 사장에 대한 기억이다.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도 <문화방송>은 정부에 ‘불편한’ 보도를 냈다. ‘정부 편향’ 보도에 대한 내부 비판·감시 기구가 작동했다.
이 때문에 기자들은 김장겸 사장의 인식을 지역주의에서 비롯한 보수 편향적 판단으로 풀이했다. 2001년 김대중 정부 시절 그는 정치부에서 한나라당을 출입했다. 그는 정치부 회식 자리에서 청와대 출입 기자를 향해 “너는 (출신 지역이) 호남도 아닌데 왜 그렇게 (김대중 대통령을) 열심히 빨아대냐(홍보성 기사를 쓴다는 의미의 언론계 속어)”는 등의 발언을 쏟아내 시비가 붙은 적이 있다고 했다. 회식 자리에 함께한 ㄹ기자는 “김장겸 사장이 농담조로 이야기하긴 했지만 왜곡된 정치관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우리 케이(K)들(고려대 출신을 일컫는 말)이 서로 뭉쳐야지’라는 식으로 학연을 강조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말했다.
2008년 11월5일 열린 보도국 편집회의의 최대 화두는 미국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가 당선했다는 소식이었다. 이 자리에서 김장겸 국제팀장은 “(오바마 관련) 보도를 많이 할 필요가 있는가. 노무현과 똑같은 사람 아니냐. 인터넷으로 젊은 사람들 선동하는”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회의에 참여한 한 기자는 “뉴스 가치를 판단할 때는 자신의 편견이나 신념과 거리를 두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김장겸 당시 팀장은 자신의 편견을 숨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연국 전국언론노동조합 엠비시(MBC)본부 위원장(앞줄 왼쪽 둘째)과 권혁용 엠비시영상기자회장 등이 8월9일 오전 ‘카메라기자 성향분석표’와 관련해 김장겸 사장 등을 부당노동행위 혐의 등으로 고소하기 위해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들어가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무보도·편향보도 주도
‘기자 김장겸’은 ‘사장 김장겸’에 어떻게 이를 수 있었을까. 그는 이명박 정권 들어 첫 보직 부장을 맡은 뒤, 6곳의 부장 자리를 거친다. 사건팀장, 국제팀장, 네트워크부장, 사회1부장, 생활과학부장, 정치부장이다. 그사이 내부 비판·감시 활동이 활발하던 구성원들의 동력이 크게 줄어 있었다. 2008년 <피디수첩> 제작진이 체포·압수수색 등을 겪었고, 2010년 김재철 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파업으로 이근행 노조위원장 해고 등 사원 41명이 무더기 중징계를 받았다. 그리고 2011년 2월. 정치부 현장 기자 경력이 2년이 안 되는 김장겸 사장이 정치부장 자리에 오르며 정치 이슈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이때 이미 문화방송 보도국은 ‘위축 효과’가 상당한 상태였다. 보도국 간부진은 김장겸 부장을 비롯해 김재철 체제가 임명한 사람들로 물갈이됐고, 현장 기자들 사이에서는 “발제해봐야 어차피 간부들이 ‘킬’할 아이템”이라는 ‘자기검열’과 무기력감이 퍼져나갔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기 한국 공영방송 저널리즘의 두드러진 특성 가운데 하나는 ‘무보도 현상’이었다. 언론학자 김수정·정연구는 해당 이슈를 둘러싼 정보가 상당 부분 공개되어 있거나 일부 언론에서 집중 보도하고 있음에도 다루지 않는 경우 역시 저널리즘이 황폐화된 상태라고 본다. ‘의도된 무보도’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학자들인 무보도 현상이 나타나는 원인으로 “특정 정파에 편향적인 태도를 가진 매체가 그 정파의 이익을 보호해줄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해봄직하다”고 진단했다.
김장겸 사장은 2년3개월 동안 정치부장을 맡으며 <문화방송>의 ‘무보도’에 크게 기여한다. 주로 정권에 불리한 이슈가 ‘보도되지 않을 아이템’으로 선택됐다. <문화방송>은 2011년 5월23~26일 4개 부처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 보도를 모두 누락했다. 5월27일 보다 못한 박성호 당시 문화방송 기자회장이 문철호 보도국장을 찾아가 “인사검증 보도가 실종된 이유가 무엇이냐”고 항의하자, 문 보도국장은 “(김장겸) 정치부장이 문제될 만한 이슈가 없다고 발제하지 않았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2011년 10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의혹도 그랬다. 10월8일 <시사인>·<시사저널>이 부동산실명제법 위반, 편법 증여 의혹 등을 제기하는 특종 보도를 내놓자, 이튿날 청와대는 곧바로 해명 브리핑을 했다. 10월10일 <문화방송>은 의혹 제기 부분을 아예 빼고 ‘대통령이 내곡동에 사저를 짓기로 했다’고 동정 소식처럼 전달했다.
“(보도)할 필요 없다. 나는 청와대의 해명이 이해가 간다.” 10월11일 오전 국회 출입 기자가 이날 열리는 대통령 비서실 국정감사에서 “사저 의혹에 대한 여야 공방이 예상된다”고 기사를 발제하자 김장겸 정치부장이 답한 말이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한 기자는 “김장겸 정치부장은 권력을 비판하고 감시하는 그런 (언론으로서의) 역할이 아니라, 권력을 비판하고 감시하는 사람을 감시하는 사람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2011년 12월30일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김근태 상임고문이 별세한 일을 대하는 그의 판단도 언론인의 판단이라고 이해하기 어렵다. 고 김근태 고문은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군사정권의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김 고문이 별세하기 직전 민주통합당에서는 출입기자들에게 중환자실에 입원 중인 김 고문의 위중한 상태를 문자로 전했다. 연락을 받은 문화방송 정치부 현장 기자들이 김장겸 정치부장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김 고문의 상태가 워낙 위중하다고 하니 부고 기사를 사전에 준비하겠다’고 했다. 담당 기자를 정해서 촬영 준비를 마쳤다고도 전했다. 그러나 중간 간부를 통해 전달받은 김장겸 정치부장의 판단은 ‘(별세하더라도) 단신 정도로 나가면 되는 일 아닌가’였다고 전해진다. 보도 주무는 정치부가 아닌 사회부로 넘어갔다.
보도국 기자들이 점차 들끓기 시작했다. 2012년 파업은 1월25일 보도국 기자들의 제작거부에서 촉발됐다. 뒤이어 1월30일 ‘공영방송 문화방송 정상화와 김재철 사장 퇴진을 위한 총파업’이 시작됐다. 170일, <문화방송> 역사상 가장 긴 기간을 기록한 파업이다.
170일 이후에도 구성원들의 ‘저강도 파업’은 지속됐다. “청와대 가서 조인트 까이고 엠비시 내 좌파 청소했다”(김우룡 전 방문진 이사장 <신동아> 인터뷰 중)는 김재철 전 사장 체제가 <문화방송>에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방송 장악’은 전 사회 차원의 민주주의 훼손과 병행됐으며 방송 민주화의 제도적 성과물도 일시에 무너뜨렸다. 이명박 정권은 방송광고 시장 현실에 맞지 않는 종합편성채널을 4개나 도입하는가 하면, “기사 잘못 쓴 매체를 쥐어패는 공작”(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2009년 12월 부서장 회의에서 한 말)을 위해 국가 자원을 동원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아래 김재철 사장 체제는 파업 중인 기자를 대체할 ‘시용’ 기자를 대거 고용했고, 파업을 이끈 노조를 ‘좌파’라고 규정해 노조원들을 제작부서 바깥으로 격리조치했다. 노조 혐오와 언론 혐오, 민주주의 혐오가 뒤섞인 ‘극우’ 성향 인사들이 방문진은 물론 <문화방송>의 주요 자리를 차지했다.
“내부에서는 매일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김장겸 사장은 지난 2월23일 방문진 사장 후보자 면접에서 “전쟁”이란 표현을 두 차례 사용했다. 이날 여권 추천 방문진 이사들은 광우병, 비비케이(BBK), 김대업 병풍,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보도 등을 역대 주요한 ‘불공정 편파’ 보도로 언급하며 이런 보도가 재발되지 않는 방안을 반복적으로 물었다. 언론노조 소속이면서 “편향된 제작물을 가져오는” 기자·피디들을 “잉여” 인력으로 분류하며, 제작부서에서 빼낼 방안을 논의했다.
김장겸 당시 사장 후보자는 이 자리에서 ‘최순실 게이트’ 보도를 자신이 <문화방송> 보도국 문화를 바꿔놓은 ‘성과’로 제시했다. 김장겸 보도국장 체제에서 세월호 참사가 정쟁 이슈로 취급됐던 것처럼, 김장겸 보도본부장 아래 ‘최순실 게이트’는 좌파들의 정권 탈취를 위한 음모로 파악됐다. 지난해 국회 청문회로 국정농단의 실체가 드러나는 상황에서도 <문화방송>은 주요 증거였던 태블릿피시(PC) 출처에 대한 의혹 보도만 10건 넘게 내놨다. 2월에는 고영태씨가 국정농단의 축이었다는 의혹을 담은 ‘고영태 녹취’ 보도를 10건 이상 보도했다. ‘애국시민들’은 서울 여의도 방문진과 상암 <문화방송> 사옥 앞에서 “<문화방송>만이 진정한 애국방송”이라며 응원 집회를 열었다.
2월23일 방문진 여권 추천 이사 6명이 김장겸 사장 선임을 강행한 날은,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를 기다리고 있던 시기였다. 15일 뒤 박근혜 정권은 탄핵됐고 그는 사장이 됐다. 그는 몰락한 정권이 퇴장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알박기 사장’이란 비판을 받으며 취임했다.
새 정부 출범 뒤 <문화방송> 보도국에는 “탈원전, 증세, 최저임금 인상 등 새 정부의 주요 정책을
비판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문화방송> 기자들은 폭로(8월7일 경제부 기자 18명 성명)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14일 오전 최고위원회의에서 “남아 있는 것이 엠비시밖에 없다”고 말했다. 자유한국당이 만든 방송장악저지투쟁위원회는 고용부 특별근로감독과 방송통신위원회의 감독권 발휘 시도를 모두 ‘문재인 정부의 방송 장악’으로 규정하며 비판하고 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엠비시(MBC)본부 조합원들이 지난 6월2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 사옥 앞에서 ‘김장겸 사장 고영주 이사장 퇴진행동 출정식’을 열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퇴진하지 않겠다”
김장겸 사장이 지금 가장 고대하는 건 어쩌면 전화 한 통일 수도 있다. 만약 문재인 청와대로부터 “사장에서 물러나라”는 메시지를 전달받는다면, ‘좌파 편향인 문화방송을 공정하게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좌파 정부의 방송 장악과 좌파 노조 탓에 쫓겨난 피해자’라는 자기 서사를 완성할 수 있다. 김장겸 사장은 23일 “정치권력과 언론노조가 손을 맞잡고 물리력을 동원해 법과 절차에 따라 선임된 경영진을 교체하겠다는 것은 엠비시를 김대업 병풍 보도나 광우병 방송, 또 노영방송사로 다시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냐”며 “불법적이고 폭압적인 방식에 밀려 퇴진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사장 자리를 지키기 위한 그의 ‘싸움’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미지수다. 문재인 대통령은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약속하고 당선됐다. 국회에 계류 중인 이른바 ‘언론장악방지법’이 통과되면 공영방송 이사·경영진을
3개월 안에 새로 구성해야 하므로 김장겸 사장은 ‘합법적으로’ 물러나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퇴진 여부와 무관하게 고용노동부와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른 법적 심판은 여전히 남는다.
문화방송 보도국 기자들이 8월11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 사옥 앞에서 제작거부 선언 기자회견을 마친 뒤 팻말시위를 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문화방송 아나운서 27명이 8월22일 오전 김장겸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과 신동호 아나운서 국장 사퇴를 촉구하며 서울 마포구 상암동 사옥 앞에서 ‘방송거부-업무거부 돌입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문화방송> 구성원들의 김장겸 퇴진운동도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이미 제작거부에 돌입한 기자·피디·아나운서 등이 350여명에 이른다. 목표는 방송 정상화다. “공영방송이란 국민의 재산인 전파를 권력의 손아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제도적 장치였으나 우리의 공영방송은 권력이 방송을 도구화하기 위해 허울뿐인 ‘공영’을 간판으로 내건 데 지나지 않고 있다. 그동안 왜곡·굴절되어온 방송 체제는 전면적으로 고쳐져야 하며 … 이것은 저 빛나는 6월 투쟁으로 우리에게 방송민주화운동의 공간을 확보해준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기도 하다.” 1987년 <문화방송> 노조 창립 선언문 일부다. ‘6월 투쟁’을 ‘촛불’로 바꿔도 어색하지 않다.
김장겸 사장은 기자 시절 영국 공영방송 <비비시>(BBC)를 더러 언급했다고 한다. ‘불편부당성’을 핵심 가치로 삼는 <비비시>에 견줘 한국 공영방송은 보도가 정권에 휘둘린다는 비판을 했다고 한 기자는 전했다. 하지만 2007년 ‘비비시 트러스트’가 낸 보고서는 공영방송의 불편부당성이 ‘경륜과 전문 지식을 가진 기자·제작자가 격렬한 내부 토론을 거쳐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문화방송>에서는 ‘경륜과 전문 지식을 가진’ 구성원들이 파업에 참여한 노조원이라는 이유로 제작부서에서 추방당했다. 김장겸 사장이 단행한 ‘치열한 내부 토론’의 추방은 ‘공영방송의 공영성 추방’으로 이어져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렀다. 공영방송은 아직 국민 품에 돌아오지 못했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