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통신 융합의 모든 혜택을 국민이 고루 누리는 방송통신 국민주권 시대를 열어가겠습니다.” 2008년 출범한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의 설립 취지는 위의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최시중 초대 방통위원장이 방통위 누리집에 공개한 인사말의 일부다.
하지만 지난 9년 방통위는 방송통신의 공공성을 보호·증진하는 대신, 정권의 언론장악에 앞장섰다. ‘무늬만 합의제’ 기구일 뿐, 다수인 정부·여당 추천 위원들의 독단적 행태가 늘 도마 위에 올랐다. 극우·막말 인사들을 공영방송 이사로 임명할 때, 종합편성채널을 도입하고 방송통신발전기금 납부 면제 등 ‘특혜’를 베풀 때 소수 위원의 문제제기는 묵살됐다. 청와대의 공영방송 인사·보도 개입 의혹과 공영방송 내부 부당노동행위의 진상을 조사하려는 규제기구로서의 노력은, 다수 위원의 반대로 무산됐다. 새 방통위 위원장·상임위원 선임을 앞두고 이들의 인사권을 쥔 청와대와 정치권에 언론계 및 시민사회의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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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세력 알박기’로 정부 추천 몫 적어 방통위 상임위는 위원장(장관급) 1명과 상임위원(차관급) 4명으로 구성된다. 대통령이 위원장과 위원 1명을 임명하고, 나머지는 여당이 1명, 국회 교섭단체인 야당이 2명을 추천해 국회 의결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오는 8일 임기가 끝나는 고삼석 위원(위원장 업무대행)의 자리를 포함하면 방통위의 공석은 모두 세 자리다. 그런데 이번 정부·여당은 5명 가운데 2명밖에 추천·임명할 수 없는 상황이다. 고 위원 후임은 야당인 국민의당 추천 몫이다. 지난 정부와 자유한국당은 3월에 당시 상임위원들의 임기가 만료되자, 당시 자신들이 가진 추천권을 활용해 김용수 위원을 새로 임명하고, 김석진 위원의 임기를 연장시켜버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 앞뒤에 강행된 일이라, 새로 들어설 정부·여당의 발목을 잡는 ‘적폐세력의 알박기’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나마 정부·여당이 추천·임명하는 인선 작업도 속도가 더디다. 위원장 후보로, 2008년 창립된 학술단체 ‘미디어 공공성 포럼’ 초대 운영위원장을 지낸 강상현 연세대 교수(언론홍보영상학)와 2기 방통위(2011~2014년) 위원을 맡았던 <동아일보> 기자 출신 김충식 가천대 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 정연주 전 한국방송 사장 등이 거론되지만, 언제쯤 윤곽이 확실해질지는 미지수다. 여당 몫 추천 위원으로 일찌감치 최수만 전 한국전파진흥원장을 내정했던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집권여당에 걸맞은 전략이 필요하다는 추미애 대표의 지시에 따라 위원 후보자를 재공모하기로 했다. 한편, 국민의당은 지난 26일 고영신 한양대 특임교수를 추천하기로 내정했으나, ‘막말’과 민영방송 사외이사 재직 경력 등의 문제로 결격 논란이 일자 의원총회 의결을 미루고 논의를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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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선 핵심 기준은 ‘개혁 의지’ 언론시민단체, 언론학자들은 새 방통위의 핵심 과제로 ‘시청자·이용자 중심의 방송통신 개혁’을 꼽으면서 이런 개혁 의지가 방통위 인선의 주요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검찰·국정원·방송 개혁’을 정부 주요 과제로 꼽은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1일 열린 지상파 초고화질 방송 개국 축하쇼에 보낸 영상 메시지에서도 “방송의 사회적 책임을 되돌아봐야 한다”, “방송의 주인인 국민이 신뢰하는 방송으로 달려가기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말하며, 방송개혁의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사람’의 문제를 넘어 ‘시스템’ 개혁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많다. 문 대통령은 후보 시절 ‘방통위 공공성 확보 방안’을 묻는 언론시민단체에 보낸 답변에서 방통위 해체까지 포함한 정부조직 개편을 고려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지난 24일 공식 발표한 정부조직개편안에 미래부·방통위 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인 최민희 전 민주당 의원은 <한겨레>와 한 전화통화에서 “법과 원칙에 따라 방통위가 본래 역할을 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대선 미디어 공약 설계에 참여한 안정상 수석전문위원은 “여당이 되었다고 해서 당의 개혁 의지가 감소한 것은 아니다. 국민의 언론개혁 요구가 지속되고 있으므로 김대중 정부에서 운영했던 한시적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방송개혁위원회’를 ‘미디어혁신위원회’로 확장해 만드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효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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